위기의 한국 경제, 21세기 국부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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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위기다. 올해 2분기 한국 GDP 성장률이 1.1%를 기록해 8분기만에 성장률 0%대를 벗어나긴 했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보면 이것이 경제 회복의 신호로 보기는 쉽지 않다. 삼성전자가 역대 최고 매출과 영업이익률을 올린 것, 그리고 SK 하이닉스가 분기 기준 최대 영업이익을 달성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을 뺀 나머지는 마이너스 성장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업체뿐 아니라 심지어 30대 대기업 중에서도 포스코, 두산 등 불황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아 고전하고 있는 기업들이 다수다.

그렇다고 쉽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인 가계부채는 8년새 3배가 증가해 1천조원에 육박하게 됐다. 기업 부진과 가계 부채의 협공은 은행권의 부실로 이어진다. 지난 3월말까지 6개 시중은행(우리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외환은행, 기업은행)의 부실대출 잔액은 13조1천억원으로 집계돼 작년 대비 12.9%가 증가했다. 성장은 한국 사회가 고비용, 고부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소비도, 투자도 없다. 복지에 대한 논쟁도 성장을 가정했을 때만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 성장이 사라지게 되면 그간 파도를 막아왔던 둑이 무너진다. 이 경우 IMF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

IMF는 그나마 아시아만의 위기였다. 1980년 이후 최초로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GDP 성장률을 기록할 때이긴 했으나, 미국 경제를 비롯해 선진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던 덕분에 우리는 그 터널을 3분기만에 통과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8분기째 일보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이 경제 회복을 위해 뿌려놓았던 달러를 회수하는 양적 완화 축소를 시도하는 탓에 금융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로피안 드림도 답이 아니다. 유럽 경제는 독일과 북유럽 국가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깊은 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유럽이 근대 이후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정치사회적 역량이 없었더라면, 지난 양차 대전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일부 남유럽 국가에서는 이제 청년 실업률이 50%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진작에 국가 전복이 이뤄졌을 수도 있었다.

1979년 개혁개방 이후 지속적으로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중국에 희망을 기대볼 수도 있으나, 중국 시장의 벽은 아직도 높다. 일당독재 공산당이 경제 자원 배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중국식 자본주의의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중국 시장에 발을 붙이기 어렵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 경제 역시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 경제의 부침에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세계 경제가 하락세를 기록하는 가운데 중국 혼자서 독주하는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대내외적인 경제 상황을 놓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논하는 건 지나치게 성급하다. 조셉 슘페터가 일찍이 그의 역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생존하는 방식은 현상 유지가 아니고 진화다. 그리고 그 진화의 방법은 창조적 파괴다. 새로운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경직된 기존의 시스템은 붕괴되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새로운 시스템이 탄생한다. 그 과정은 기계적인 교환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인 변이에 가깝다. 그런 슘페터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 한국 경제의 위기는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지난 100년 가까이 우리가 유지해왔던 산업시대의 유산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때가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기적인 절망이 아니라 장기적인 희망,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 새로운 우선순위의 정립이다.

예를 들어 끝없이 올라갈 줄 알았던 20세기초 미국 경제를 하루 아침에 바닥으로 떨어뜨린 대공황을 기억해보자. 무엇이 대공황을 벗어나게 했느냐는 경제학에서 케인즈주의자들과 통화주의자들의 오랜 논쟁거리다. 그러나 이 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건 대공황의 그늘에서도 약동했던 기술 혁신과 그를 통한 창조적 파괴다. 온라인 결제 서비스인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이기도 했던 피터 티엘은 그가 2011년 10월에 내셔널 리뷰 온라인에 기고한 ‘미래의 종말’이란 글을 통해 바로 이 시기에 라디오, 영화, 항공, 가전, 고분자화학, 2차 석유 회수 산업이 태동했음을 지적한다. 그건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질서가 확립돼 가고 있다.

구글은 검색엔진을 넘어 안드로이드를 통해 모바일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구글글래스를 통해서 새로운 디바이스 시장 개척을 위해 약진한다. 아이언맨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에 가장 근접할 것 같은 페이팔 출신 앨런 머스크는 민간 우주 사업에 이어 테슬라를 통해 전기차 시장에 도전한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시장 영역은 인터넷 서비스에 머물지 않으며 새로운 기술 혁신이 필요한 거의 전산업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사업 개척의 목표가 미국뿐 아닌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는 것인 만큼, 한국을 비롯한 주요 경쟁 국가들이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시대에 한국 사회에 정말 중요한 질문은 경제 위기도 자본주의의 종말도 아니다. 넥스트 애플과 구글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 만들기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되려 그런 창조적 인재들, 창조적 기업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구축하는 데 있다.

산업 혁명을 선도했던 영국을 기억해 보자. 영국은 본래 유럽의 강국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의 변두리 국가에 가까웠다. 대항해시대를 시작함으로써 무역으로 재미를 본 걸로 따진다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다. 일찍이 왕권 강화에 성공한 두 나라는 함대를 구축해 원거리 무역을 시행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이들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였다. 문화적인 우월함으로 따진다면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던 프랑스에 앞서지 못했다. 영국의 귀족들도 상류 사회의 교류를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우울한 섬나라 영국이 산업 혁명을 선도할 수 있었나.

MIT 경제학과의 대런 에이스모글루 교수와 하버드 정치학과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가 2012년에 발표한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는 그 이유를 ‘제도’에서 찾는다. 퍼스트 무버도, 탁월한 문화도 없었지만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포용적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영국은 11세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정립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을 시도한다. 왕은 임의적으로 영주에게서 세금 징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영국은 대륙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산적인 정치 시스템을 발달하게 된다.

이 정치 시스템은 산업 초기 인프라 구축에는 불리했다. 이것이 영국이 해양 국가임에도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해 대항해시대 개척에 늦어진 이유다. 그러나 스페인, 포르투갈의 대서양 무역의 혜택은 대부분 왕과 그에 결탁한 귀족에게로 흘러갔다. 반면에 분권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진 영국에서는 그 혜택이 왕과 그에 결탁한 귀족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 계층, 상공세력에게로 흘러갔다. 이들 상공세력이 이후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제도를 영국 정치 체제 내에 정착시키고, 사적 재산권과 보다 광범위한 정치 참여를 제도화한다. 산업 혁명이란 새로운 기술 혁신이 등장했을 때 정치 엘리트들 대다수가 지주들인 유럽의 대륙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지대 보호에 위협이 되는 기술 혁신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영국의 상공세력과 의회는 이런 기술 혁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본질적으로 ‘우선순위의 재정립’이라고 한 건 이런 지난 역사의 패턴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고도 전세계에 내세울 만한 인터넷 산업은 존재하지 않은 우리 현실이 근대 초기의 영국보다는 스페인, 포르투갈에 가까워 보이는 건 오산일까. 인터넷 인프라 자체는 그렇게 우수하지 못하지만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실리콘밸리에서 영국 산업혁명 초기를 본다면 착각일까.

영국의 산업혁명, 오리지널 창조경제를 만들어낸 건 영국의 제도이고 정치다. 먼저 정치적 권리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경제적 가치 혁명이 나올 수 있었다. 산업혁명만 보고 명예혁명을 보지 않는다면, 애플만, 구글만, 실리콘밸리만 보고, 그걸 만들어낸 표현의 자유를 수정헌법 1조로 삼고 경쟁법을 발달시킨 미국 사회의 제도적 역량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권리만 따지는 정치도 아니고, 이윤만 따지는 경제도 아니며, 그 둘을 연결할 수 있는 21세기의 정치경제학, 21세기의 국부론이다. 그들 간의 우선순위를 정립하고 그걸 정책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사회적 움직임이다.

진화를 위한 창조적 파괴는 창조뿐만 아니라 파괴도 있다. 이 파괴는 특별히 기득권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판이 흔들린다면 자신들의 밥그릇에 위협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기술 혁신을 통해서 경제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파이가 커진다고 해도, 그 전체 파이에서 내가 차지할 몫이 줄어든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런 흐름에 저항할 인센티브가 있다. 국가의 역할은 이런 기득권의 행동에 제어를 걸고, 공정한 경쟁의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이것이 창조경제를 대표적 국정 과제로 추진하고자 하는 박근혜 정부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창조경제는 창조뿐만 아니라 파괴도 있어야 한다.

슘페터의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 기회를 만들어내는 건 우선적으로 권리의 발전이다. 개인의 권리가 위임되서 만들어진 공권력이 남용될 때가 아니라 절제될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사용될 때, 기득권은 견제하고 새로운 사회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투명하고, 책임있는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질 때 한국의 미래는, 그리고 그 한국을 통한 글로벌 경제의 미래는 밝다. 기술 혁신이라는 경제 발전의 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은 그러한 포용적인 제도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

uk_industrial_revolution▲사진 : http://www.flickr.com/photos/84859669@N08/8285005898. CC BY-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