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시 읽는 조지프 슘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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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행정부의 국가 경제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래리 서머스는 그의 2009년 백악관 발표문에서 ’21세기는 아담 스미스도, 존 메이나드 케인즈도 아닌 조지프 슘페터의 세기’라 명명한 바 있다. 경제 불황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해법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케인즈의 정부 역할 확대와 거시경제 조율이 아닌, 슘페터의 혁신과 기업가정신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소 생소한 용어였던 ‘기업가정신’이란 말이 불과 수년만에 다수의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인 창조경제의 근본적인 방향성도 한국 자본주의의 역동성의 부활에 있는 만큼 슘페터의 정치경제적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슘페터의 사상은 그의 역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창조적 파괴’란 단어 하나를 슬로건으로 만든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되레 그와 같은 사상의 슬로건화는 슘페터가 일생동안 가장 경계하고 심지어 가장 경멸해 마지 않았던, 지적으로 게으른 태도다. 그건 지성이 아니라 반지성주의에 가깝다. 나아가 슘페터의 사상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슘페터뿐만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 기초한 창조경제를 비롯한 새로운 정책들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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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슘페터의 사상 안에서는 혁신, 기업가정신, 창조적 파괴, 자본시장 개혁, 리더십이 분리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주제들이 따로 논리되고 있고, 슘페터가 강조했던 통합된 사회적 비전의 역할은 축소되고 있다. 이 역시 슘페터가 강조했던 지적 태도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슘페터는 학자들은 분석을 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 비전을 갖고 있다고 봤다. 그 비전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분석을 사용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학자들이 특정 아이디어에 왜 관심을 갖게 되는 지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의 일생 최후의 작품이 플라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한 ‘경제 분석의 역사’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런 학자들의 비전이 그들의 분석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객관화를 통해서 좀 더 정확하게 자본주의를 통찰할 수 있는 학문적 체계를 경제학 내에서 만들기 원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슘페터의 세기에 살고 있지만, 그 사상을 만든 슘페터의 일생에 대해서는, 그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다. 그의 사상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그 사상의 근저에 있는 그의 삶과 꿈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하다.

그 점에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토마스 맥크로우 교수가 썼고, 지난 2012년에 ‘혁신의 예언자’란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약 500쪽에 달하는 슘페터 평전은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21세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자 중 하나인 슘페터를 슘페터가 원했던 것처럼 슬로건이 아닌 사고의 체계로, 생각뿐 아니라 삶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데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슘페터를 다시 읽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슘페터의 일생과 사상의 연결고리를 다음의 5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슘페터는 기업가였다.

일생 동안 외모와 품위에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썼고, 맞춤 정장을 아침마다 2시간씩 공들여 차려입은 후 외출했지만 슘페터는 귀족은 아니었다. 이는 대영제국의 절정기에 명망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스쿨과 캠브리지를 거친 후 관료를 거쳐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슘페터의 일생의 라이벌 케인즈와 대비되는 점이다. 슘페터는 평범한 기업가 집안에 태어났고, 4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은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야심찬 그의 어머니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으로 이주했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과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퇴역장성과 결혼한다. 이 양아버지의 후원으로 슘페터는 빈대학에서 수학하고, 이곳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이런 성장 배경으로 인해 슘페터의 안에는 평범한 자신의 출생의 배경과 비범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공존했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일반적인 학자들처럼 강사부터 교수직까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보다는 유럽을 유람하며 각국의 주요 경제학자들을 만나는 길을 택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의 상류층 여성을 만나 결혼한다. 또한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집트에서 변호사일을 맡는다. 즉, 그는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에서 기업가였다.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한 슘페터는 스스로의 지성과 열정으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믿었다. 그에겐 결핍이 열등감의 원천이 된 것이 아니라 끓임없는 열정과 집념의 근원이 됐다.

2. 결핍이 열정을, 고난이 헌신을 만들다.

경제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은 빈 시절에 이미 세웠고, 자신이 자본주의를 연구하겠다는 목표도 이미 그때 정했지만, 그에 관련된 사상이 완숙하는 데는 일생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변호사에서 대학 교수로 변신하기 위해 변호사로 일을 하는 동안에 자신의 처녀작을 완성했고, 대학 교수가 된 뒤에도 현실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을 지냈다. 장관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다소 사치스러운 그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학계로 곧바로 돌아오기 보다는 은행가의 길을 걷기도 하지만, 곧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표는 학문 발달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학문에 전념하고 대학 교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후에도 그는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으로 거쳐를 옮겨야 했다. 그 과정에는 양차대전 등 비극적 세계사도 영향을 미쳤다. 조국 오스트리아는 패망했고, 두 번째 조국 독일은 나치에 의해서 변질됐으며, 세 번째 조국 미국은 군사화되는 현실을 목도했다.

개인적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여성에게 매력을 잃은 바 없는 슘페터는 세 번 결혼했다. 그렇지만 가장 사랑했던 노동계층 배경의 두 번째 아내는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이도 이내 사망했다. 슘페터는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를 잃은 고통과 함께 평생 이 상처를 벗어나지 못했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슘페터를 헌신적으로 일생동안 보조했던 동료 학자인 세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슘페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눈부신 커리어는 중간에 꺾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멀고 험난한 길에서 태생의 결핍이 자산이 됐던 것처럼, 불우한 사건들은 학문에 전념하는 동기가 됐다. 밀턴이 시력을 잃고 ‘실락원’을 쓰고,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운명’을 작곡했던 것처럼,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너무도 많이 잃어버린 슘페터에겐 학문에 헌신하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 됐다.

3. 사회과학은 사회적 문제를 푸는 지적 기술이다.

슘페터의 처녀작부터 최후 저술까지 그의 업적에 쏟아진 공통된 찬사가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내용과 다양한 주제가 통일된 사고의 체계를 통해 정리돼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슘페터에게 사회과학은 사회적 문제를 푸는 지적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학자였지만,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자본주의의 역동성,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회학, 역사학, 심리학 등에서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슘페터는 그 누구보다도 경제학에서 수학의 사용을 강조했고, 그의 제자 중에 폴 새뮤얼슨 등 경제학의 수학적 기초를 정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많은 제자가 나왔으나, 본인은 수학을 중요시하되 수학에 얽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칼 맑스 외에는 비견할 학자가 많지 않을 만큼 사회과학 전분야에 유산을 남긴 학자가 됐다. 이는 그가 요새 말하는 융합의 유행을 탔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항상 경제학자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그의 주관심사는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경제적 변화에 고정돼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풀고자 하는 문제를 더 잘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누구의 것이든 망설이지 않았을 뿐이고,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슘페터는 유연한 만큼 지적으로 강한 학자였고, 강한 만큼 창의적인 학자였다. 그가 정의한 혁신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조합이었는데, 이런 개방적 태도를 통해서 슘페터 본인이 자신의 학문 체계에서 혁신을 실현하고 있었다.

4. 슘페터는 통합된 사회 비전이 있었다.

슘페터의 일생의 꿈은 자본주의는 움직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안정된 자본주의’란 그 말 자체로 모순이었다. 기업가란 그에게 자본주의를 움직이게 만드는 기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기업가정신이란 그런 기업가의 덕목이었고, 혁신은 그 기업가의 도구였고, 신용은 그 기업가가 혁신을 진행하기 위한 자원이었다.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저술인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한 책이다. 달리 말하면 슘페터는 거의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이론부터 경제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에 대해 썼지만, 하나의 일관된 관심이 있었다. 그건 이 자본주의란 새로운 체제를 뉴턴역학적인 경직된 체제가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처럼 약동하고 변화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슘페터의 고뇌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경제학에서 수학의 사용을 강조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엄밀한 경제학을 만들기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전파하고자 하는 경제학이 그런 수학으로는 포착이 안 되는 기업가 등 다양한 변수가 있었다. 그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평생을 싸웠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싸움,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적 긴장’이 슘페터를 슘페터답게 만들었다. 그가 그리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그의 학문 역시 계속되는 내적 긴장 속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슘페터에게 있어서 기업가의 최대의 적은 기업가다. 창조적 파괴가 파괴하는 대상은 이전의 기업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슘페터의 최대의 적은 슘페터였다. 그의 통합된 사회적 비전은 자신 안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역사학 등 새로운 사상과 도구를 수용해가며 발달해 나갔다.

5. 주는 사람만이 지속 가능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슘페터는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않았고, 엘리트 의식도 강했다. 자신의 동년배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특성도 있었다. 그의 지인은 늘 그보다 나이가 한 세대 이상 많거나 적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슘페터는 항상 합리적이고,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유럽이 양차대전의 전란에 휩싸여 있을 때 그는 자신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던 유럽의 지인과 동료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무리 분주하고 다망해도 동료 학자들을 돕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있어서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절친한 하버드 동료와 제자들 중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만 3명이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훌륭한 투자였다. 슘페터가 독일과 미국에서 대학 교수직을 확보하려 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건 친구들이었다. 어머니와 아내들의 헌신을 빼놓고 슘페터의 삶과 성공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인적 보험이 탄탄했기 때문에 슘페터는 그의 인생의 수많은 고난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연구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슘페터가 일만 하고 사람을 자산으로 축적하지 못했다면 그가 성공가도에 오를수록 더 많은 적이 생겼을 것이고 공분만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길이 남을 지적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21세기는 슘페터의 세기라는 말은 애플,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기업, 실리콘밸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생각하면 이론을 달기 어렵다. 하지만 슘페터의 일생과 사상의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슘페터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주춧돌이 돼 새롭게 만들어 나갈 21세기를 정확히 아는 데도 무리가 있다. 그것이 슘페터의 세기에 슘페터의 인생과 사상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다.  중요한 것은 슘페터가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왜, 어떻게 말했느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