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밥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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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상가 중 한 명은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였다. 1928년 함부르크에서 견습생으로 지내던 시절 키에르케고르를 처음 접했던 드러커는 당시 타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떨림’을 읽기 위해 덴마크어를 배우기도 했다. 또한 1989년에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드러커는 왜 종교단체를 비롯한 비영리단체의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됐냐는 질문에 자신은 경영에 관심을 가진 후에 종교와 단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언급한다. 이는 드러커의 일생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일깨워준 인간의 영적, 존재적 측면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준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드러커가 테일러주의에 반대해 노동이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의 경영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을 왜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인 것도 이러한 드러커의 기본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러커가 키에르케고르에게 배운 것은 사회공학만으로는 결코 인간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993년에 출판한 ‘생태학적 비전’이란 에세이집에 수록된 ‘결코 유행하지 않는 키에르케고르’란 글에서 드러커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을 통해 죽음을 전제로 하여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성격은 사회적 기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 기능이 개선된다고 해서 사람이 더 사람답게 사는 건 아니란 걸 깨달았다고 역설한다. 달리 말하면, 드러커의 주장은 사회적 기능의 개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의 개선이 인간 삶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줬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곳에만 인간의 자유가 있고, 인간의 자유가 있는 곳에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드러커 경영철학의 요체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런 드러커의 시각에서 보면 작금의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 붐은 여전히 ‘결코 유행하지 않는’ 키에르케고르다. 21세기 초의 대표적 기업가 중 한 명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시대적 우상이 됐고, 그가 만트라처럼 이야기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조화’는 위기에 몰린 인문학이 영업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됐다. 인문학이 어떻게 밥벌이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돼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끓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잡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잡스’의 개봉의 여파 중 하나도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론이 아닐까한다.

잡스의 인기 덕분으로 덩달아 인문학도 흥행하긴 하나, 지금의 인문학 유행의 핵심은 경제발달과 이윤창출의 도구로서 인문학이다. 자기 계발을 통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인문학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경영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에게 있어 인문학은, 키에르케고르는 경제발달과 이윤창출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발달의, 이윤창출의 총체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기능 개선의 목적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택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경영학을 만들었다.

캡처

▲구글 트렌드 ‘인문학’ 검색 결과’. 2009년 아이폰 출시 이후 잡스의 인기와 비례해 치솟는 인문학 검색 빈도.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서 인문학도 고답적인 문사철의 암기 학습이 아니었다. 잡스의 인문학 역시 피터 드러커에게 있어 키에르케고르가 가지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건 새로운 컴퓨팅 기술이, 그것이 개인용 컴퓨터가 됐든, MP3 플레이어가 됐든, 모바일이 됐든, 태블릿이 됐든 누구를 위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다. 그것이 그의 독자적인 경쟁력을 만들었다. 더구나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서든 피터 드러커에게 있어서든 그들의 인문학은 현실과 유리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주어진 현실속에서 그런 인문학적 고민을 했으며, 그 성찰을 그들의 삶의 업적으로 남겼다. 각자 자기 분야의 혁신가로서 잡스는 디지털 산업의, 드러커는 경영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세상엔 소통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삶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잡스와 드러커는 모두 후자를 택했다. 현재 국내 인문학은 어느 쪽을 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왜 고민하고 있는가.

나는 학부에서 영어영문학과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9학기를 재학하는 동안 178학점의 과목을 수강했고, 그 중에서 인문학 과목을 다수 그리고 고루 수강했다. 정치학 전공자로서 비록 비교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지만, 정치철학이나 정치이론 수업도 학문적 기초를 쌓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글을 쓰는 까닭도 인문학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되레 사랑하기 때문이다. 드러커와 잡스에게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인문학이란 내가 추구하는 경험적, 실증적 연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본질로서, 밥벌이의 도구가 아니라 밥벌이의 목적으로서 인문학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먹고 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법학, 경영학이나 공학이, 혹은 인문사회학 내에서는 심리학이나 통계학 등 응용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들이 훨씬 더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밥만으로는 안 되고, 그 밥을 어떻게 왜 벌고, 어떻게 나눠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고민의 실천에서만 우리가 진정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인문학이 밥벌이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무엇을 ‘왜’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남과 다른 것, 더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문학이 존재하는, 존재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그런 만큼 나는 인문학이 더더욱 현실에 착근하길 원한다. 인문학은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고, 인문학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드러커는 키에르케고르에서 출발했지만 경영학을 신설하는 데 공헌했고, 잡스의 인문학도 그의 제품, 기업, 새로운 산업으로 꽃을 피웠다. 인문학은 일부 엘리트에게 독점됐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으로, 그들의 현장 속으로 녹아들어갔을 때 더 힘이 있다. 인문학의 경제적 수단화는 동의하지 않지만, 인문학의 사회적 대중화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인문학은 교실 안에서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는 학자들의 사상을 맥락없이 논의할 때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바탕이 됐을 때 살아 있다.

인문학은 인문학 전공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이 공부를, 이 일을 ‘왜’ 해야 하는 지를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인문학의 출발점이다. ‘검증되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고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내걸었던 소크라테스 이래 인문학이란 그렇게 현실에서 담금질됐고 현실에서 숙성됐다. 인문학을 인문학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인문학과 사회 모두를 위한 길이다. 인문학은 더 인문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하고, 인문학은 더 개인의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