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치적 책임성이 창조경제에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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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 국가에서는 짐이 곧 국가다. 이와 달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곧 국가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직접 통치를 행하진 않는다. 생업이 있고 일상에 바쁜 사람들이 공공의 의사 결정을 위해 지속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쏟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공평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통치권을 위임하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택한다.

여기서 절대주의 국가와 대비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은 정치적 책임성이다. 국민의 대표는 스스로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책임을 다할 때만 그의 통치 권력이 인정된다. 통치 권력의 근간은 국민의 동의다.

이런 정치적 책임성이 있고 없고는 한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작지만 큰 차이다. 예를 들어서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아사하는 까닭은, 가까운 북한 땅에도 그런 사람들이 수백만이나 있는 까닭은, 단순히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독재 국가에서도 독재자가 굶주리는 경우는 없다. 아시아인 중에서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하버드대의 아마트리아 센 교수가 누누히 강조해왔던 것처럼, 지구촌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야만 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가야 할 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빵을 달라고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책임성의 존재는 분배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생산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로널드 코스 등 제도경제학자들은 흔히 재산권의 발달이 한 나라의 경제 발달에 핵심이라고 말한다. 재산권이 발달하지 않으면 경제적 재화의 생산과 분배 활동을 진행하는 데 드는 비용, 소위 거래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재산권이 발달하지 않은 국가 경제는 매출이 늘어도 비용이 커져서 수익이 감소할 수 밖에 없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재산권의 발달만으로는 경제적 생산이 활성화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는 영국 못지 않게 재산권이 발달돼 있었고, 전반적으로 법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법치의 역할은 소수의 정치적 엘리트와 다수 평민간의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전쟁으로 낭비한 국세는 각종 면책특권을 활용한 귀족들이 아닌 평민을 대상으로 충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팽배한 불만과 분노를 조율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는 없었다. 루소와 볼테르를 비롯한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프랑스 사회에 평등의 이상은 심어주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은 만들어주지 못했다. 끝내 프랑스는 폭력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혁명으로 치닫게 된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랐다.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은 영국의 재산권을 확립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의 연합이 의회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왕당파에 반대하는 개혁적 정치인에서부터 상공세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세력 연합이 이뤄졌고, 이들이 재산권 발달에 정치적 책임성을 더했다. 이러한 더 강한 정치적 책임성은 더 강한 정치적 신뢰를 만들었다. 이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급격한 사회적 구조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을 축적했고, 기존 세력의 기득권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각종 정치적 장치를 구축한다.

이러한 정치적 발달을 바탕으로 영국은 산업혁명이란 당대의 가장 급격한 사회적 구조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기득권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도 도구도 부재했던 프랑스뿐 아니라 포르투갈, 스페인 등 영국을 앞서 대항해시대를 개척했던 국가들도 국력 차원에서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 결과 영국은 급격한 경제 발달을 통해 유럽의 변방국가에서 중심국가로, 대영제국으로 도약한다. 정치적 발달은 경제적 발달에 선행했으며, 그 핵심은 정치적 책임성이었다.

박근혜 정부 이후 한국은 창조경제를 꿈꾼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민주화의 실현을 기치로 복지국가를 원한다. 달리 말하면, 실리콘밸리식 혁신과 핀란드식 복지를 동시에 추구한다. 이 두 목표가 양립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국정 목표의 수립이 한국 사회의 정책 결정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학습화된 행동이란 측면에서 제도는 20세기 중반의 경제개발 모델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와 일부 사업자간의 관계가 핵심이다.

예를 들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포탈, 정확히는 네이버 규제에 관해서도 포탈과 미디어 기업, 중소 사업자간의 관계가 문제시될 뿐 가장 근본적인 이용자 후생 및 권리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관련된 사업자들간의 밥그릇 싸움 중재에 그치고 만다. 일본 및 한국의 시장 규제의 특징 중 하나인 통제된 경쟁으로 결론이 나고 만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성을 기준으로 보면 국가 권력이 사용되는 기본적인 기준은 국민의 권익, 그들 사업자를 포함한 이용자의 권익 증진이다. 따라서 이용자 권익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서는 정치적 책임성이 실현됐다보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성을 배제하고서는 인터넷 산업에 관련된 경제적 자원의 분배와 생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판단하기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포탈 규제 이전에 존재했고 지난 2012년에 헌법재판소에서 한정위헌 판결을 받은 제한적 본인확인제(일명 ‘인터넷 실명제’), 여전히 말이 많은 공인인증의무제, 중복과 과다 규제로 문제시된 게임 셧다운제의 공통점은 무리한 사전 규제다. 공격적 온라인 표현, 인터넷 금융 거래 보안, 게임 중독에 관련된 청소년 보호란 규범적 목표는 나름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정치적 책임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규범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정책은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 사전 규제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여지만으로 규제한다는 측면에서 행정 권력의 남용이라 볼 수 있다. 침해된 다수의 권리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책임지지 못할 정책을 실현하는 것은 정당한가. 나아가 거듭 강조하지만 정치적 책임성 없이 과연 우리 인터넷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다 보면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놀라운 정치적, 경제적 발달이 거대한 비전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중요한 아이디어의 공유와 실천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17세기 명예혁명의 핵심 주장이 된 ‘대표성 없이는 세금도 없다’는 슬로건이 18세기 산업혁명의 주춧돌이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당시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였다.

남보기에 그럴듯한 정책은 말 그대로 남보기에만 그럴듯할 뿐이다. 작지만 중요한 아이디어에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그를 통해서 그것이 제도적으로 실현될 때 사회가 진보한다. 한국의 창조경제도 이런 역사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 이스라엘 혹은 다른 곳에서 우리 토양에 맞지도 않는 제도를, 부작용을 잘 확인하지도 않는 제도를 섣불리 이식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노력은 기본기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용자 권익 증진 없이는 인터넷 규제 신설도 있어선 안 된다. 정치적 책임성이 있는 곳에 혁신은 더 쉽게 일어날 수 있고 그 혜택은 더 쉽게 나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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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Leonard Bently. CC BY-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