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루스벨트를 기다리며

가 +
가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주장한다.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도 초기 발전 단계에 있어서는 국가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미국 초대 조지 워싱턴 정부 하에서 재무장관으로 봉직(1789-95)한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이가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갚고 연방정부의 주정부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미국 사회 내에서 국가 역할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부모 역할이 자식의 성장에 따라 바뀌는 것처럼, 미국 사회 내에서 국가 역할도 계속 바뀌었다.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임 윌리컨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인해 부통령을 역임하다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기회의 땅’은 극심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남북전쟁 후 잠시 일었던 경제호황은 곧 이은 불황으로 이어졌고, 석유왕 존 D. 록펠러를 비롯한 일부 기업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가운데 다수의 서민은 몰락했다. 이들 신흥 경제 권력의 성장은 미국 자본주의의 경쟁 모델뿐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공정 원칙마저 위협했다. 그간 미국의 고속 성장을 지탱해오던 정치경제 모델이 지속할 수 있는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논의가 심화되던 때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선 미국 사회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독과점기업 규제를 강화했고, 언론 기능을 확장했고, 노동자 권익 강화를 위해 힘썼다. 연방정부가 독과점기업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은 1890년에 오하이오주의 존 셔만 상원의원이 주도한 셔만 반독점법이 의회에서 통과됐을 때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 법안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경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한 것은 루스벨트 때부터다.

▲백악관 서관의 루스벨트룸.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 촬영됐다. 퍼블릭 도메인.

또한 루스벨트는 언론 자유를 지지했다. 연설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판을 흔쾌히 들었고 반론을 즐겼다. 백악관의 서관(일명 ‘웨스트윙’)에 루스벨트룸 혹은 기자회견실을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기자들을 만나 국정을 공유했던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다. 이런 대통령의 언론 정책 덕분에 루스벨트의 개혁 시대는 저널리즘의 황금 시대기도 했다. 출판인 새뮤얼 시드니 맥클루어의 맥클루어 매거진이 미국 저널리즘의 탐사 보도 시대를 열었고, 록펠러의 독과점 비리를 폭로한 아이다 타벨, 육류산업의 문제점을 파헤친 업튼 싱클레어 등 20세기초 미국의 대표적 기자들이 맥클루어의 리더십 하에서 활동했다.

나아가 루스벨트는 노동자들의 쟁의를 통한 권익 주장에 대해서도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뉴욕시 경찰청장(1895-97) 재임 시절부터 노동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그는 뉴욕시의 반복되는 노동 쟁의 문제에 맞서 노조 대표들을 사석에 초대해 대담을 요청했고, 자신을 ‘청장’이 아닌 그저 ‘루스벨트’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3시간에 걸친 마라톤 토론에서 루스벨트는 폭력 사용은 안 된다는 합의와 노조 지도자들의 루스벨트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얻어냈다.

이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개혁 시대’의 유산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번영의 기초가 됐다. 언론이 자유롭게 부정과 비리를 폭로할 수 있었고, 식품 안전, 관세, 철도 규제 등에 이르는 다양한 개혁 법안들이 순조롭게 의회에 통과될 수 있었던 이 시기의 경험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루스벨트 개인과 그 시대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 됐다. 예를 들어, 루스벨트 본인은 재임 말기에 대기업 규제에 대해서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한 번 구르던 돌은 멈추지 않았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1913-21) 재임 중인 1916년에 대법관에 임명돼 1939년까지 봉직한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루스벨트의 개혁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공정 경쟁 등에 관한 법률을 강화했다. 1914년에는 연방경쟁위원회(FTC)가 신설돼 경제 권력 집중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전통이 제도로 안착됐다. 미국의 인터넷 산업 발달 과정이 이러한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공정 경쟁에 관한 법률과 제도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이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루스벨트의 개혁시대의 유산은 오늘날 미국 인터넷 산업의 번영과도, 미국 경제의 신성장 동력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2010년 아이폰 쇼크 이래로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에서 유행해왔다. 그러나 우리 문제의 뿌리는 그보다 더 깊다. 21세기 초의 한국 사회도 약 100년 전 미국 사회와 유사하게 ‘고속’ 성장을 ‘지속’ 성장으로 바꾸기 위한 근본적 체질 개선의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속도는 둔화된 지 오래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들은 적자를 면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가계부채는 1천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정부부채가 문제라면 한국은 가계부채가 위기여서, 경제한파가 불어닥칠 때 서민이 느낄 추위는 더 에이다.

기업과 가계의 불황에 따라 은행권의 부실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이제 ‘정부’란 ‘사다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미래부를 주축으로 적극적인 정책 추진을 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산업정책 2.0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 국가의 역할은 ‘산업 발전’ 하나에 집중해 있었다면, 이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조화와 공존과 발전을 추구할, 더 크고 복잡한 책임을 국가는 맡고 있다.

중요한 건 ‘성장’에 앞서 ‘건강’이다. 우리의 공정 경쟁은, 언론은, 노사관계는 건강한가. 일부 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이 아닌 공정경쟁을 우선시한 정책이, 사실의 은폐가 아닌 자유 보도를 강조한 언론 정책이, 노사의 타협과 조율, 통합을 목표로 한 노사정책이 실현되고 있는가.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조정하는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가.

같은 위기를 루스벨트는 무리한 정부 지원이나 과도한 정부 규제가 아닌, 공정 경쟁의 기틀 마련과 자유 언론 기반 구축, 노조와 적절한 타협 추구를 통해 이뤄냈다. 이 과거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빨리 가는 것 뿐 아니라 멀리 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젠 한국의 스티브 잡스뿐 아니라 한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시 절실하다. 아직 꽃 피지 않은 우리의 개혁시대가 올, 그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