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프린터] ⑧합법과 불법 경계 달리는 ‘도면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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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프린팅 기술이 대중에 소개되고, 쓰임이 날로 확장하고 있다. 3D프린터는 컴퓨터로 제작한 3D 모델 자료를 바탕으로 실제 물체를 출력하는 기술을 말한다. 3D 모델 자료만 있으면, 프린터로 글자를 인쇄하듯 물체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시제품 제작에 응용되던 기술이 의료와 건축,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소품 제작에 이르기까지 용도를 넓히는 추세다. 3D프린팅 기술에 ‘제조업 혁명’과 같은 수식을 붙이는 까닭이다.

3D 모델을 바탕으로 실제 물체를 출력해주는 기술이라는 점 때문에 저작권 문제는 3D프린팅 기술 업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게임 속 탱크 디자인이나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의자는 누군가의 창작품이요, 지적재산이기 때문이다. 좁게는 출력 결과물에 대한 저작권에서 넓게는 도면을 공유하는 일 자체에 관한 저작권까지. 업계와 법 전문가 사이에서 3D프린팅 기술을 둘러싼 지적재산권 문제 토론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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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로 출력한 ‘마이리틀포니’ 캐릭터

3D프린팅 기술의 지적재산권 침해 사례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미국에서는 3D프린팅 기술의 지적재산권 침해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씽이버스, 셰이프웨이스 등 3D 모델 자료 공유 서비스가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3D도면으로 만들어 이 같은 웹사이트에 공유하면 어떻게 될까. 아래에서 소개하는 3가지 사례는 모두 지적재산권 문제와 엮여 빛을 보지 못한 경우다.

#. 1

미국의 그래픽 디자인 아티스트 토마스 발렌티는 3D 모델 공유 사이트 씽이버스에 직접 제작한 3D 도면을 등록했다. 게임 ‘워해머 40000’에 등장하는 탱크를 직접 모델링한 것이다. 게임 개발업체인 영국의 게임즈 워크샵은 토마스 발렌티에게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씽이버스는 해당 3D모델링 자료를 모두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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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로 출력한 ‘워해머 40000’ 피규어

#. 2

3D프린팅 기술 스타트업 뉴프로토는 지난 2013년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스마트폰 충전 거치대를 3D프린터 출력용 도면으로 만들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강철 왕좌’를 본뜬 충전 거치대였다. 뉴프로토는 사용자끼리 창작물을 공유하는 웹사이트 인스트럭터블에 강철 왕좌 스마트폰 거치대 디자인을 50달러 가격에 등록했다.

하지만 뉴프로토의 도면 판매 계획은 중단됐다. ‘왕좌의 게임’을 방영 중인 유료 방송 채널 HBO가 저작권을 근거로 뉴프로토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HBO는 뉴프로토의 라이선스 계약 체결 요청도 거절했다. 해당 디자인을 스마트폰 거치대로 만들기 위한 라이선스는 이미 다른 업체와 맺었다는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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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영감을 얻은 스마트폰 충전 거치대

#. 3

지난 2014년 여름 디자이너 클라우디아 응은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유명한 ‘포켓몬스터’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어 3D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는 화분을 만들었다. 이 도면을 3D 모델 판매 사이트 셰이프웨이스에 등록했지만, 지금은 해당 도면 자료가 모두 삭제된 상태다. 닌텐도가 저작권을 문제 삼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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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로 출력한 ‘포켓몬’ 캐릭터 화분

아리송한 지적재산권 침해 범위

3D프린터와 저작권 침해 문제는 크게 2가지 상황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3D 모델 도면을 제작하는 행위와 3D 모델 도면을 활용해 제품을 출력하는 경우다. 아직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참고할만한 판례는 부족한 실정이다. 기존 법을 토대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 3D 모델 도면을 만드는 행위

강철 의자나 포켓몬 등 특정 사물을 3D로 모델링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이 발간한 ‘3D 프린팅 기술의 발전에 따른 지적재산제도 개선 필요성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미국과 국내에서는 법률 문제를 비켜갈 가능성이 크다.

3D 모델링은 유형의 사물을 정보화하는 단계다. 국내 특허법에서는 유형의 물체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하고 있다. 3D 도면은 유형의 물체라 보기 어려워 특허권 침해 문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디자인보호법도 마찬가지다. 3D 도면을 디자인 보호 대상인 ‘물건’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비슷하다. 3D 도면을 제작하는 것은 생산에 해당하지 않아 특허권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저작권법은 102조에서 설계도 등을 저작권으로 보호하고 있어 저작권 문제는 남아 있다.

■ 3D 프린터로 물건을 출력하는 행위

강철 의자나 포켓몬 캐릭터 등 이미 누군가에게 지적재산권이 있는 제품을 3D 도면을 활용해 실제 물건으로 출력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특허권과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등을 침해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처음에 소개한 사례에서 보듯, HBO와 닌텐도, 게임즈 워크샵이 발끈한 까닭이 여기 있다.

하지만 교육이나 보도 등 공익을 목적으로 한 사용은 불법이 아니다. 저작권법은 23~38조에서 ‘저작 재산권의 제한’을 정의하고 있는데, 공정이용 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소영 3D아이템즈 변호사는 “여러 가능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국 법조계나 하버드 로스쿨, 국내 법조계에서 등에서도 3D프린팅 기술과 지적재산권 문제를 연구 중”이라며 “아직 한국에서는 사례가 없지만, 3D 모델을 공유하는 서비스가 확산하면 앞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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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프린팅 기술을 둘러싼 지적재산권 논의는 법과의 발전 속도보다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새로운 기술을 법이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해 창작과 기술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는 우려는 IT산업 태동기부터 제기돼 왔다.

포켓몬 캐릭터 디자인과 닌텐도 사이에 발생한 지적재산권 논란을 다시 보자. 클라우디아 응 디자이너가 3D 모델링 자료를 셰이프웨이스에 등록하고, 닌텐도는 셰이프웨이스에 ‘침해행위 중지 선서서(Cease and desist)’를 보냈다. 국내법으로 따지면 침해정지청구에 해당한다. 셰이프웨이스는 침해행위정지 선서서를 받은 직후 포켓몬 디자인 파일을 삭제했다. 창작자인 디자이너는 해명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웹사이트에 등록된 것을 본 뒤 이에 대해 소명을 하면 온라인 사업자는 이를 즉시 삭제해야 책임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에 따른 것이다. DMCA가 마련한 온라인 사업자의 면책 조항은 저작권자와 온라인 사업자, 창작자의 삼각구도에서 사실상 창작자를 배제하는 셈이다.

섣부른 규제는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15년 1월 영국 지식재산청(UKIPO)은 ‘3D프린팅 기술이 지식재산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법적, 실증적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영국 지식재산청은 보고서에서 3D프린팅 기술 규제에 관한 법을 만드는 일이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잠재적으로 지식재산권에 관한 침해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영국 지식재산청의 보고서는 영국 정부와 UKIPO에 섣부른 법률 제정이나 법적 조치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 한편, UKIPO에서 실무진을 조직해 3D 도면 자료의 저작권 성립 여부를 명확히 할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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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프린터로 출력한 캐릭터 ‘마이리틀포니’

DRM∙라이선스 등 대안 찾아야

3D 모델 도면에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기술을 적용하는 식으로 지적재산권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DRM은 복제나 배포가 쉬운 디지털 콘텐츠에 식별마크를 넣거나 사용 권한을 부여하는 기술로, 저작권 보호를 위해 쓰인다.

2013년 오센타이즈가 개발한 DRM이 대표적이다. 도면 구매자가 한 번 물체를 출력하면 재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기술이다. 국내의 저작권 보호 기술 전문업체 마크애니도 3D 프린터 도면 DRM 기술 ‘캐드 세이퍼’를 내놨다. 네트워크에 가상 공간을 마련해두고, 3D 프린터 도면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도면 파일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다. 가상공간 외부에 자료를 저장하거나 e메일에 첨부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3D프린팅 업계의 DRM 도입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우선 기술적 실효성이 의문이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이 발간한 ‘3D프린팅과 지재권의 문제’ 보고서는 “DRM이 미디어 파일의 불법복제를 효과적으로 방지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라며 “모든 제품과 물체에 지재권을 표시하더라도 다양한 우회 방법을 통해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재권을 보호하기 어려움”이라며 취약성을 경고한 바 있다. DRM이 적용된 음반이나 게임, 전자책 등도 다양한 방법으로 복제돼 유통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설명을 이해하기 쉽다.

DRM 기술 적용이 3D프린팅 기술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는 지적이나 ‘기술 사유화’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지적도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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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웨이스’에서는 해즈브로가 소유한 캐릭터 ‘마이리틀포니’의 창작과 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라이선스 모델 중에서는 살펴볼 만한 사례가 있다. 기업이 3D프린팅 기술을 인지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다. 미국 장난감 전문업체 해즈브로와 도면 공유 웹사이트 셰이프웨이스의 협력 모델에 주목해보자.

해즈브로는 ‘마이리틀포니’라는 이름의 말 캐릭터를 갖고 있다. 지난 2014년 7월 해즈브로는 셰이프웨이스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개인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마이리틀포니 캐릭터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캐릭터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디자이너가 만든 마이리틀포니 캐릭터 3D 도면이 셰이프웨이스를 통해 판매되는 형태다.

피터 바이즈마쉬호센 셰이프웨이즈 공동창립자 겸 CEO는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해즈브로는 (3D 모델 도면을 공유하는 일을) 금지하는 대신 가능하도록 했다”라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일은 사용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우리도 싸울 필요가 없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밝혔다.

셰이프웨이스는 판매액 중 일부를 챙길 수 있고, 디자이너도 도면을 판매해 돈을 벌 수 있다. 해즈브로도 셰이프웨이스와 맺은 파트너십 덕분에 라이선스 비용을 매출로 가져가는 구조다. 3D프린팅 업계에서 지적재산권 문제를 해결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소영 변호사는 “셰이프웨이스에서 시범적으로 시도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라며 “이러한 모델이 활성화되면 디자이너의 자유로운 창작도 보장할 수 있고 저작권자도 다른 이에게 저작권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서로 ‘윈윈’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