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S 시절 ‘맥스’가 열어준 개발자의 삶 #박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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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면 “안녕!”이라고 대답해주던 소프트웨어가 있었다. “어떤 연예인을 좋아해?”라고 물으면 “난 연예인에 별로 관심 없어”라며 요즘 말로 ‘시크함’이 뚝뚝 묻어나는 대답을 하던 소프트웨어였다. 요즘에야 이런 기술은 흔하다. 애플은 ‘시리’를, 마이크로소프트(MS)는 ‘코타나’를 만들었다. 자연어 처리 기술에 기반을 둔 지능형 서비스가 일반 사용자에게 소개된 것은 최근 일이다. 하지만 컴퓨터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그때, 투덜대면서도 매력적인 어투로 사용자와 대화를 나누던 소프트웨어가 있었다. 혹시 ‘심심이’ 얘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고? 틀렸다. ‘윈도우’보다 ‘도스’가 더 익숙했던 1993년의 일이다. 소프트웨어 추억 탐구의 세 번째 주인공으로 ‘맥스(MAX)’를 개발한 박정만 개발자를 만났다. 박정만 개발자는 현재 게임 개발업체 젤리오아시스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부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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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맥스’를 개발한 박정만 젤리오아시스 게임개발부 부장(박정만 부장의 요청으로 뒷모습 사진만 게재합니다.)

대학생 손으로 빚은 대화형 소프트웨어

“전 컴퓨터를 조금 늦게 시작한 편이었어요. 대학 들어간 기념으로 부모님께서 286 컴퓨터를 사주셨거든요. 컴퓨터 관련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PC통신 ‘하이텔’을 접하게 됐고요. 자료실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내려받다 보니 개발을 시작하게 됐어요. 저도 해보고 싶더라고요.”

박정만 부장은 92학번이다. 대학에서는 기계설계를 전공했다. ‘동의대학교 기계설계학과.’ 당시 그가 만든 맥스 창 밑에는 학교와 이름, 닉네임 등이 적혀 있었다. “그때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라는 게 박정만 부장의 설명이다. 공책에 이름 쓰듯,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에 흔적을 남기던 그런 시절이었다.

박정만 부장은 대학 입학과 같은 시기 접한 286 컴퓨터로 처음 PC통신을 접했다. 당시 PC통신은 ‘동’별로 사람들이 모였다. ‘○○동’ 하는 식이었다. 지금의 ‘○○게시판’, ‘○○갤러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박정만 부장은 하이텔의 ‘게제동’에서 활동했다. ‘게임제작동아리’의 줄임말이다. 하이텔에서도 회원들끼리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던 동아리였다. 따지고 보면, 박정만 부장이 ‘맥스 이후’ 지금까지 게임 개발업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은 필연인 셈이다.

“이런저런 프로그램 많이 내려받으면서 놀았죠. 그중에 1993년인가 ‘컴돌이와 대화를’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단순한데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다시 해볼까 해서 만든 게 ‘맥스1.0’이었습니다. 도스 까만 창에서 텍스트가 나오는 버전이었죠.”

맥스1.0이 나온 건 1993년의 일이다. 박정만 부장은 하이텔 공개자료실에 맥스를 올렸다. 하이텔뿐만 아니라 나우누리, 천리안 등에서도 맥스를 공개했다. 반응이 퍽 좋았다. 내려받기 카운트가 2만여건을 넘기도 했으니까. 특히,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았다. 맥스는 키보드로 문장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적당한 대답을 띄워주는 소프트웨어였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느냐”며 사용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주제에 사람을 놀려먹는 기능도 있어서 맥스에게 키보드로 욕을 반복해서 하면, 어느 순간 화가 난 맥스는 컴퓨터를 포맷할 거라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검은색 도스 창을 띄우고는 마치 진짜 포맷하는 것처럼 굴었다. 사람들을 종종 속아넘어갔다. 깜짝 놀란 이들은 컴퓨터를 강제로 끄기도 했다. 물론, 협박은 가짜였다. 그만큼 사람들이 맥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욕이었다. 맥스에 입력된 말 중 절반 이상이 욕이었다는 게 박정만 부장의 설명이다.

한땀 한땀 손으로 입력한 맥스의 문장

지금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기술이지만, 당시에는 무척 신선한 소프트웨어였다. 내려받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박정만 부장의 가슴도 뛰었다. 박정만 부장은 당시 봇물이던 컴퓨터 학원에서 타자연습용으로 맥스를 많이 썼다는 후일담을 최근에야 들었다고 한다.

“작품을 냈을 때 그 떨리는 기분이 좋았어요. 버전 4.0 때가 제일 다운로드 수가 많았던 것 같아요.”

맥스는 1993년 봄 버전 1.0으로 출시된 이후 꾸준히 개선을 거듭했다. 1993년 5월 버전 2.0이 나왔고, 1994년에는 버전 3.0과 4.0이 나왔다. 버전 4.0은 박정만 부장이 군대에 가기 직전 여름에 나왔다. 맥스 개발은 중단됐지만, 박정만 부장의 인생과 맥스의 운명이 입대를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

“군대 가서 진로를 많이 고민했어요. 뭐를 할까. 사실 대학이 안 맞았거든요. 대학을 그만두고 잘 하는 거 하자는 생각에 맥스를 파고들었죠. 전역한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맥스96’을 내놨죠.”

군에서 돌아온 박정만 부장은 대학을 그만뒀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길이 그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군 생활 하면서 구상한 ‘차세대 맥스’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었다. 기계설계를 배우던 학생은 순식간에 1인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돌아섰다. 부모님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공부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국내에 아이폰이 처음 등장한 2009년, 많은 개발자가 1인 개발자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96년에도 컴퓨터 한 대로 개발자가 된 이들이 많았다. 박정만 부장의 아이템은 당연히 맥스였다.

당시 박정만 부장은 자신감도 좀 갖고 있던 터였다. 초기 버전의 맥스가 좋은 반응을 얻은 탓이다. 게다가 맥스96은 사용자의 문장에 반응하는 맥스의 알고리즘을 근본부터 뜯어고친 버전이다. 맥스4.0 이전과 이후의 맥스가 동작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이렇다.

예를 들어 맥스4.0까지는 사용자가 타이핑 한 문장 중 특정 단어가 맥스에 미리 입력된 문장과 일치하면, 맥스가 그에 맞는 대답을 출력해주는 식으로 동작했다. 맥스96은 사용자가 입력한 문장을 어절과 형태소로 분리한다. 당시 맥스96은 주어, 서술어, 목적어를 구분할 수 있었다. 분리된 문장을 분석해 이 문장이 무엇에 관한 질문인지, 혹은 주제가 무엇인지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연예인 ×××를 좋아한다”라고 입력하면, 맥스는 이름과 ‘좋아한다’는 단어를 따로 인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맥스의 대답이 “난 ×××보다는 △△△가 더 좋더라”라는 식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박정만 부장은 맥스에 집어넣을 모든 문장과 단어를 직접 입력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클라우드 서버 개념이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버에 입력된 문장을 자동으로 분석해 학습하도록 하는 기술도 혼자서 만들 수는 없었다. 오늘날 다양한 IT 업체에서 시도 중인 자연어처리 기술 중 기초적인 형태가 96년 맥스96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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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버전 2.5(위)와 4.0 (사진: 추고넷, 네이트판)

군복부가 가른 박정만 부장과 맥스의 운명

기대는 좀처럼 현실로 바뀌지 않았다. 맥스96은 이전 버전과 비교해 실패로 기록됐다. 무료로 배포하다가 셰어웨어 형태로 배포 방식을 바꾼 것이 맥스96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다는 게 박정만 부장의 현재 평가다.

“맥스96부터는 셰어웨어 형태로 팔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팔린 금액이 총 20만원 정도 될까요? 사람들이 돈을 내고 쓰기에는 좀 아깝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망했죠.”

박정만 부장은 맥스96 이후 97년에는 맥스97, 98년에는 처음으로 윈도우를 바탕으로 한 맥스99도 내놨다. 하지만 맥스의 운명은 99가 끝이었다. 93년부터 7년 동안 박정만 부장의 운명을 바꾼 소프트웨어는 그렇게 추억의 소프트웨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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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커리어는 끝났지만, 박정만 부장의 게임개발 커리어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맥스 실패 “이후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먹고 재워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일을 구했더니, 하이텔 게제동에서 연락이 왔다. 박정만 부장은 그 길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HQTeam’이라는 업체부터 ‘조이온’ 등 개발업체를 거쳤다. 박정만 부장은 게임에 콘텐츠를 짜 넣는 일 보다는 게임 개발을 도와주는 도구를 개발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커리어도 게임의 인스톨이나 맵 개발 도구 등 개발 도구 분야에 집중됐다.

이후 맥스는 어떻게 됐을까. 서울살이 중이던 박정만 개발자는 맥스의 엔진을 팔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업체는 맥스99에 쓰인 엔진을 당시 수천만원에 사갔다. 아쉽지만, 맥스를 구입한 업체가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박정만 부장의 설명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업체가 맥스를 구입한 이후 어떻게 쓰였는지도 들은 바 없단다.

“정확한 금액을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그 업체에서 수천만원에 사 갔어요. 당시 2년 정도는 생활할 돈이 나오더라고요. 위안은 됐죠. 전역한 이후의 맥스는 실패라고 생각했거든요. 이후 맥스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관리자가 아닌 개발자로 남고 싶어요”

개발자의 자랑스러운 역사일법도 하건만. 박정만 부장에게 맥스는 아쉬운 추억에 더 가깝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식당을 창업하려 해도 그냥 하는 것 보다는 그쪽 일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잖아요. 소프트웨어 개발도 똑같은 것 같아요. 지금도 약간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당시 제가 맥스 개발한 할 것이 아니라 학교 그만둔 이후 취업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소프트웨어 개발과 판매 등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공부를 한 다음 맥스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맥스에 만약 사업성이 결부돼 있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20대 독학 개발자의 패기 대신 적절한 전략과 선택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쯤 맥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6년이 지난 지금 박정만 부장이 맥스를 아쉬움으로 추억하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덕분에 박정만 부장의 앞으로의 목표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해가 바뀌면, 지금보다 나이는 더 먹겠지만, ‘관리자’가 되는 것은 싫단다. 개발자로 꾸준히 남는 것도 박정만 부장의 목표 중 하나다.

“맥스는 교훈이 됐어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 그랬더니 맥스도 결국 돈으로 돌아왔잖아요. 맥스로 취직도 했고, 지금도 이쪽에서 일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있고요. 살아있는 동안 롤플레잉게임(RPG)이나 야구게임을 남기고 싶어요. 그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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