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추석

2006-10-02     황치규

추석입니다. 



때문에 지난주 블로터닷넷 편집본부의 기획회의 화두 역시 추석이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대표 블로터 '싼바'의 일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추석인데, 관련 특집좀 해야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나올줄 알았습니다. 대한민국 IT기자라면 명절 때마다 쓰는 기사 패턴이 있습니다. '휴대폰과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이용하면 고향가는 길이 즐겁다느니', '인터넷에 있는 추석 관련 서비스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느니' 하는 식입니다.


이번에도 디지털 시대의 추석을 조명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겠지요. 의미는 있습니다. 그런데 블로터닷넷까지 꼭 그렇게 해야할까요? 오픈한 지 얼마안돼 사이트를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생각끝에 싼바에게 따져물었습니다. "추석특집 꼭 해야돼요? 너무 뻔한 거 밖에 없잖아요!" 좀 더 다른 식으로 써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순간 싼바의 '클로징 멘트'가 떨어졌습니다. "그래? 그럼 니가 한번 알아서 써봐. 이걸로 추석 기획회의는 끝!" 그날 블로터닷넷의 추석기획회의는 생각했던 것보다 무지 빨리 마무리됐습니다.  기획회의에서 어떤 의견을 제시하면 자기가 뒤집어 쓸 확률이 크다는 법칙아닌 법칙은 역시 위력적이었습니다. 



몇시간째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추석에 대해 쓰려니 진도가 나가지지 않습니다. 결국 "괜한 얘기는 꺼내 가지고 사서 고생을..."이란 후회마저 밀려오는 군요.



그래도 즐겁습니다. 추석 연휴만 생각하면 흐뭇해집니다. 저는 고향이 대전인데, 월요일 오후 기차를 끊어놨으니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6일간은 일단 일에서 해방됩니다. 너무 좋습니다. 정말로 휴식이 필요했거든요. 절 아시는 분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미혼인 탓에 명절때가 되면 걱정이 태산같은 주위 어른들의 공세에 시달렸지만, 언제부터인가 '노하우'가 생겼는지 지금은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습니다. 그냥 웃고 말지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데 선수가 된 듯 합니다.


이번 추석에 저는 가족들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친지분들 찾아뵙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방어선에서 끝낼 생각입니다. 돌이 안된 조카도 많이 안아주고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눌 것입니다. 늦잠의 행복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책도 좀 읽어야겠습니다. 어제 서점에 가서 세 권의 책을 샀습니다. 그동안 읽고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밀어뒀던 토머스 L.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 조정래 소설 <인간연습>,  <리영희 저작집 12권-21세기의 사색>입니다. 추석때 반드시 소화하고 서울에 올라올 것입니다.


영화도 한 편 안볼 수가 없죠. 제일 좋아하는 여자배우인 장쯔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야연을 찜해놨습니다. 올초에 '게이샤의 추억'을 봤으니 같은해 두번씩이나 장쯔이의 호수같은 눈을 볼 수 있게 됐군요. 올라와서 영화리뷰도 하나 써 올리겠습니다. 한심하다 하실 분들도 있겠네요. 추석인데 너그러운 이해를~



술 좋아하는 제가 고향에 가서 영화, 책에만 파묻혀 있을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친구들과 소주한잔 주고받는 시간도 가져야겠지요. 요즘은 알코올 도수가 약한 소주를 많이 마셔서인지 '캬~'하는 맛이 별로 안나지만, 그래도 친구놈들과의 음주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품잡을 필요없고, 시쳇말로 '공장 얘기' 안해도 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아 '일차'는 포장마차에서 제가 쏘고 다음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적당히 빌붙기 전략을 시도해야겠습니다. 얻어먹을때 "고맙다"란 말 안해도 되는 이들은 그래도 친구놈들 밖에는 없습니다.


추석에는 사색의 시간도 많이 갖고 싶습니다. 저와 저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참 생각없이 살았더군요. 그동안 바쁜 후배들 붙잡고 '폼 잡으며' 거룩한 얘기 참 많이도 했는데, 부끄럽습니다.


저는 추석에 인터넷 들어가서 뉴스보고, e메일 확인할 여유는 없을 같습니다. 앞서 말한 것들만 하려해도 6일 연휴는 너무 짧습니다. 디지털에 연결하는 것은 연휴 이후로 미뤄야겠습니다. 



그런데 습관이란 게 무섭지 않습니까. 혹시하며 e메일함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저를 수시로 유혹할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한 친구는 그러더군요. "아직까지 명절때 중요한 e메일 확인못해 대사를 그르쳤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누가 다급한 소식을 그것도 명절에 e메일로 보내겠느냐?" 생각해보니 맞는 말입니다.



아뿔싸! 게임 매니아인 또 다른 제 조카가 마음에 걸리는 군요. 시도 때도없이 PC방 가자고 조를텐데, 이번에는 자전거타러 가자고 한번 꼬드겨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추석 연휴에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나요? 한여름 무더위에 잠들 많이 설치셨고 추석전에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하시느라 고생들 많으셨지요? 고향가는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도착하시면 재충전의 시간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가족들과 많은 얘기들도 나누시고요. 멀리 안가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e메일, 인터넷 등 익숙한 디지털 문화와는 잠시 거리를 둬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몇년전 영화배우 한석규는 모 이통통신 광고에서 "이런 곳에서는 휴대폰을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했는데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석에 "디지털은 잠시 멀리하셔도 좋습니다"고 말한다고 해서 생뚱맞다는 얘기는 안듣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