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추석 선물, '책읽는 버스'

2006-10-03     이희욱

추석 연휴를 코앞에 둔 9월 29일 금요일 새벽 6시 20분. 도시의 번잡함이 채 기지개를 켜지 않은 시각, 서울 강남구 논현문화정보마당 앞 대로변에 낯익은 버스 한 대가 먼길 떠나기에 앞서 그렁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다.

"엄마, 저기 네이버 버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손을 꼭 잡고 지나가던 꼬마가 반색을 하며 외친다. 버스를 휘감고 있는 네이버 로고가 낯익은가 보다. 네이버가 좋은책읽기가족모임과 함께 시작한 '책읽는버스'가 꽤나 유명하긴 유명한 모양이다.

지난해 11월 첫 시동을 켰으니, 그럭저럭 1년이 다 돼 간다. 전국 도서·산간지역 오지를 돌아다니며 마을도서관을 지어주고 아이들에게 책을 기증하느라 엔진 식을 날이 없었다. 오늘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북일초등학교 마을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러 가는 날. 올해만도 벌써 11번째다. 그것도 죄다 장거리 여행에 덜컹거리는 시골길이다. 팔자 참 사납기도 하다.

강남구가 운영하는 논현문화정보마당에 도착하니 모두들 모여 있다. 조그만 회의실 탁자 한가운데 백발 성성한 거구의 어르신네가 목청을 돋우며 '책 예찬론'을 술술 풀어낸다. 김수연(60) 목사다. 사단법인 좋은책일기가족모임을 17년째 이끌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마을도서관을 만들어주고 있는 '책 전도사'다. 맞은편에선 김미라 교수(성균관대 응용심리연구소)와 동화연구가 윤경희 씨가 김 목사의 일장연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변현주 사무국장은 인원을 체크하고 일정을 점검하느라 눈코뜰 새 없다. 그 와중에도 일행이 속속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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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책읽는버스가 전남 장성 북일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책읽는버스는 45인승과 35인승 2대가 매주 전국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이동 도서관 역할을 한다. 45인승이 3천여권, 35인승 버스는 2500여권의 신간을 싣고 있다. 

6시 45분. 예정보다 15분 늦게 버스는 시동을 걸었다. 3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려 장성 톨게이트 통과. 아뿔사, 그런데 그만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덩치 큰 책버스가 읍내 왕복 2차선 좁은 길 한가운데 갇혀버렸다. 차도 한켠을 메운 먹거리와 옷가지들, 한가로이 담배를 물고 있는 촌로들 사이에서 오가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란.

답답한 마음에 김 목사가 경상도 특유의 억센 말투로 참견하고 나선다.

"버스 내비게이션 고장났나? 와 이리 길을 못 찾고 헤매나." "지난번 지방 다녀올 때부터 이상했습니더. 오늘 AS 맡길 겁니다." "그래? 어쩐지 고속도로에서 내내 조용하더니만."

겨우 읍내를 벗어났나 싶더니, 이번엔 조그만 굴다리가 나타난다. '위험! 높이제한 3.7M'.

"저거 통과할 수 있겠나?" 다시 슬금슬금 진입.

"아직 쪼매 여유 있어요." 옆에 있던 유 실장이 외친다. '휴~.'

10시. 북일초등학교 교문으로 버스가 들어섰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버스 시동이 꺼지기 무섭게 선생님들이 달려나와 반기며 손을 덥석 잡는다.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어요!" 따스하다.

북일초등학교는 교장·교감선생님을 포함해 18명의 교직원이 근무하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시골학교다. 2층 건물에 강당과 급식소까지. 시골 학교치곤 나름대로 규모를 갖췄다. 1925년 개교한 이래 올해 77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전체 학생수는 60명 정도이지만 최근 2~3년 사이 해마다 10여명씩 줄어드는 추세란다. 교감선생님의 이마 주름도 해마다 조금씩 깊게 패인다.

올해초 전라남도교육청으로부터 5천만원을 지원받아 도서관현대화사업을 시작했단다. 시설공사는 마쳤는데 책을 살 돈이 다 떨어져버렸다. 예전부터 보관하던 책이 7천권쯤 있었지만, 대부분 10년 이상 된 탓에 아이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다. 급한 김에 동창회에도 연락하고 지역 유지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좋은책읽기가족모임의 마을도서관 개설운동 소식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민들의 연명부를 받아 지원서를 넣었다가 뜻밖의 반가운 선물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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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측은 교실 2칸을 개조해 온 주민이 드나들 수 있는 쉼터로 새단장했다. 이를 위해 올해 초에는 전남도교육청으로부터 5천만원을 지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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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서관 한켠에는 독서대와 소파, 컴퓨터 등이 마련돼 편히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북일초등학교 마을도서관은 교실 두 칸을 개조해 만든 아담한 쉼터다. 새단장을 하고도 책이 없어 쩔쩔매던 차에, 김수연 목사가 앞장서 신간 3천권을 들여놓으면서 9월 29일 무사히 개관식을 치렀다. 10권 중 6권은 아동용 책이지만 어른들을 위한 책도 꽤 있다. 도서관 한켠에는 아담한 소파와 독서대, 컴퓨터 등이 마련돼 있다.

마을주민들이 하나둘 도서관으로 들어선다. 김미라 교수의 특강을 듣기 위해서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기르기 위해선 학무모들이 앞장서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김 교수의 강의에 주민들은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치며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시골이라고 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가 결코 모자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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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라 교수가 '독서! 왜 중요한가'란 주제로 북일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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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윗층에선 동화구연이 한창이다. "어흥~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꺄악~!" 동화연구가 윤경희 씨의 몸짓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며 박수를 친다.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 아이들의 웃음에 해가 중천 너머로 꺾이는 줄도 모르고 북일면이 들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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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연구가 윤경희 씨의 동화구연은 아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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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흥~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꺄아아악~~"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평소 같으면 식당으로 뛰어가련만, 오늘은 운동장에 서 있는 책읽는버스 앞에서 줄서느라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다. 김수연 목사와 변현주 사무국장이 나눠주는 배지를 저마다 가슴에 차고는 줄지어 버스에 오른다. 좁은 버스가 금세 아이들로 만원버스가 된다. "선생님, 앉을 자리가 없어요!" "밖에 나가 책 읽어도 돼요?" 아무래도 아우성은 쉬 그칠 태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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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모두들 가슴에 배지 하나씩 달라구!" 김수연 목사가 나눠주는 네이버 지식캠페인 배지를 아이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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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앞으로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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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자 몰려든 아이들로 책읽는버스는 금세 만원버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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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책 읽고 싶어요." 유치원생들도 책읽는버스에 동승하고 싶어 길게 줄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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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밖에서도 뜨거운 독서 열기.

점심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개관행사가 시작됐다. 먼저 도서관 개관에 앞서 진행됐던 마을백일장 시상식. 주민부문 장원상 정태순 씨와 학생부문 6학년 한소리 어린이를 비롯해 마을사람들이 골고루 상과 기쁨을 나눠가졌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에선 아이들이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게 됩니다. 낡고 오래된 책들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요. 이렇게 선뜻 새책을 기증해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박래섭 교감선생님의 얼굴이 모처럼 활짝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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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북일도서관 개관식. 교장선생님과 학생들, 마을주민 모두가 도서관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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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읽기가족모임은 모두 3천권의 신간을 기증했다. 이 가운데 2천권이 아동도서, 1천권이 성인용 도서다.

몇 사람의 연설이 지나고 권혁일 NHN 이사가 주위의 재촉에 쑥스러운 듯 연설대에 오른다. 권 이사는 NHN 사회공헌팀을 이끌고 있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한, 그는 마을도서관 개관 행사때면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야 뭐 작은 정성을 보태는 정도죠. 사실 도서관 행사는 김수연 목사님이 워낙 열심히 하셔서, 저희야 늘 죄송하고 몸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뒤이어 김수연 목사가 강단에 들어선다. "저어기, 떠드는 학생 누굴까. 여러분, 안 떠들고 얌전히 있는 학생에겐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아이들이 금세 입을 다물고 자세를 고친다.

'할아버지'가 꺼낸 선물은 다름아닌 네이버 모자. "와아~!"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지고 손이 올라간다. "거기, 너 이녀석.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들던데. 앞으로 수업시간에 안 떠들고 아버지 어머니 말씀 잘 듣겠다고 약속하면 할아버지가 선물을 줄게. 약속할 거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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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식에 맞춰 열린 글짓기대회 시상식. 대상을 탄 어린이에게 권혁일 NHN 이사가 네이버 모자를 씌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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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고 착한 어린이가 돼야 해." 김수연 목사의 다짐에 아이가 쑥스러운 듯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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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목사의 구수한 강의에 아이들도 어른도 마냥 흥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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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2개월 된 딸과 함께 개관식에 참석하신 마을 아주머니. 네이버 모자를 쓰고 멋진 포즈를 취해주셨다.

어느덧 시계바늘은 오후 2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다. "자, 갈 길이 멀어요. 어서 서둘러 출발합시다." 김수연 목사가 또다시 대열을 독촉한다. 아이들은 아쉬운 듯 버스 귀퉁이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른다.

갑자기 최동수 교장선생님이 김수연 목사의 양복 끝자락을 붙잡고 조그만 박스 몇 개를 수줍게 건넨다. "너무 고마운데, 딱히 드릴 건 없고…." 지역특산물인 새송이버섯이란다. "아이고, 오히려 저희들이 특산물을 사드려야 하는데…." 오가는 정이 따습다. 북일면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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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마을도서관은 앞으로 북일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어린이들의 지식의 샘으로 자리잡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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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 삼매경에 빠진 어린이.

전날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는 김수연 목사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쉬이 잠을 청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버스 탓만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행사 끝나고 돌아올 때면 늘 허전하고 쓸쓸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살붙이가 있는 따스한 가정, 편안한 잠자리, 안정된 직장과 오랜 친구들, 손주들의 재롱과 어리광.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리라. 올해로 환갑. 지나온 삶을 하나씩 정리할 시간일 지도 모른다. "난 이 일을 정리해야 해. 죽을 때까지 정리하는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거지." 차창 밖으로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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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복도 한켠에 놓인 낡은 풍금을 변현주 좋은책읽기가족모임 사무국장이 감개어린 표정으로 연주해보고 있다. 변현주 사무국장은 MBC 아나운서 시절부터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책보급 운동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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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방송국 카메라도 개관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일마을도서관에 쏠린 지역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