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얼리어답터 대한민국「그리드 컴퓨팅은 예외?」

2006-09-05     nanugi

우리나라가 전세계 IT 기업들의 테스트 베드로 알려진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일부에서는 버그 투성이 소프트웨어(SW)를 국내 시장에서 테스트한 후 이를 다듬어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고 비판도 하지만 최신 기술을 그만큼 빨리 접할 수 있다는 점은 국내 IT 업계만의 장점이자 기회이다. 한편 이러한 명성(?) 뒤에는 국내 IT 기업이나 일반 사용자들의 얼리어답터 성향도 한몫을 하고 있다. 실제로 오라클의 최신 DBMS인 오라클 10g와 9i의 전세계 얼리어답터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나라 사용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얼리어답터 성향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몇 년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리드(Grid) 컴퓨팅이다. 그리드란 기업 규모가 성장하고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고가의 더 빠른 하드웨어를 도입하는 대신, 기존에 사내에 이미 운용하고 있지만 유휴 자원으로 남아있던 컴퓨팅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초점을 맞춘 해법이다.



예를 들어 A, B, C 컴퓨팅 자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가운데 업무나 역할에 따라 B 자원의 처리량이 몰려 전체 시스템에 병목현상이 발생한다면 일반적으로 B에 새로운 시스템을 추가하는 대안을 고려하겠지만 그리드 컴퓨팅에서는 A와 C의 유휴 자원을 이용해서 B의 업무 일부를 대신 처리한다. 새로운 시스템이나 하드웨어를 추가하지 않고도 기존 시스템의 병목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드의 핵심 기능으로 가상화와 리소스 공유, 모니터링, 동적 프로비저닝 등이 꼽힌다.



그리드를 가장 잘 활용해 온 지역은 북미와 유럽이다. 그리드 컴퓨팅의 가장 큰 수혜분야로 알려진 것은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와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과 같은 코어 비즈니스 시스템인데, 이미 핵심적인 기업 업무에 전문 솔루션을 도입해 활용해 온 이들 국가들은 하드웨어의 확장 대신 그리드 컴퓨팅을 이용해 성능과 비용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예를 들어 메인프레임 DB와 일반 유닉스 DB 등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경우 여신이나 수신 등을 서로 분리해 사용했으나 그리드 기술로 이들 데이터를 공유해, 데이터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를 기존 시스템 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그리드 지수 5.3의 이면



이처럼 그리드는 DB를 기반으로한 기업용 애플리케이션의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히고 있지만 KT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DB가 운용되고 있는 국내에서는 그리드 사례가 공개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삼성생명, 외환은행, KTF 등이 오라클의 그리드 솔루션을 도입해 활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기업 이름만 공개됐을 뿐 실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른 그리드 솔루션 관련 기업들의 레퍼런스도 몇년째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왜 그럴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기존의 기업 시스템 구축 전략이 인프라 확장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오라클이 매년 두차례 발표하고 있는 오라클 그리드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의 그리드 지수는 5.3으로 전세계 평균인 5.4와 비교해도 대등한 수준이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오라클 10g 등 그리드를 지원하는 솔루션과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어 높을 점수를 받은 것이지 채택률, 지식 및 관심 지수 등의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서비스지향아키텍처(SOA) 토대가 취약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SOA란 서비스 단위로 웹 서비스를 프로그래밍하는 재사용가능한 애플리케이션 개발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고 하면, 관련 지원 시스템의 구매를 신청하는 것부터 실제 런칭까지 최소 몇 달이 걸린다. 그러나 그리드 기술을 사용하면 가상화 기술을 통해 기존 하드웨어의 여유 공간에 별도 구역을 설정하고 여기에 기존에 사용하던 웹 서비스를 옮겨 심기만 하면 바로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다.



이 때 구매 서비스 컴포넌트, 인사관리 서비스 컴퍼넌트 등 필요에 따라 ‘재사용’하기 위한 기초가 바로 SOA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 대부분은 아직도 웹 서비스로의 전환을 이행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어 SOA나 이를 기반으로한 그리드와 같은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업체별 그리드 제품에 대한 검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솔루션 별로 이기종 간의 데이터 포맷에 대한 지원 여부나 솔루션 벤더들이 기업 환경에 적합한 통합 그리드 솔루션을 갖추고 있는지 등은 아직도 주요 그리드 업체들 간의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그리드를 향한 긴 여정은 '이제 시작'



그리드가 국내에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다. 정부 주도의 그리드 포럼은 현재 국내외 기업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포럼으로 대체돼 민간 영역으로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그리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에는 아직도 C/S 환경에 머물러 있는 기업 IT 인프라와 그리드에 대한 낮은 이해 등 다양한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리드만으로 다양한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리드와 가상화, 웹서비스 모두가 구축되야 비로소 이들간의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드 사례를 대대적으로 발굴해 발표하기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라클의 아태지역 테크놀로지 아키텍처 부문 크리스 첼라이어 수석 이사도 “한국은 그리드 컴퓨팅을 위한 가상화 단계에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리드는 단순하게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긴 여정과 같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