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디자인 경영, 10년의 발자취

2006-11-28     김달훈

“디자인이 뭐 이래! 색상은 정말 촌스럽군!” “어라? 이게 뭐지? 아하~ 정말 기발한데! 가만 있어봐 당장 하나 살까?” 요즘 고객들 물건을 보는 눈높이가 태산만큼이나 높다. 쓰임새도 편리하고, 기능도 다양해야 하지만 멋스러움이 빠진 제품은 속없는 붕어빵이나 마찬가지다. 디자인이 곧 상품의 존재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다.



‘21세기 경쟁력의 핵심은 디자인이며, 유능한 인재는 국가의 재산이다.’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경영 지표로 디자인 혁명을 내 세우며 디자인 경영을 강조했던 것도 일찍이 이런 변화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 혁명을 역설한 지 10년이 되는 지난해에는 그룹차원의 디자인 4대 전략을 발표하며 보다 강도 높은 디자인 혁신을 주문했다.



10년간의 디자인 혁명으로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어 내는 성과가 있었지만, 초일류 브랜드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제 2의 디자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패션과 디자인을 상징하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제 2 디자인 혁명 선포가 이루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삼성 그룹의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2 디자인 혁명 선포식에서는 4가지 전략이 발표됐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유저 인터페이스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가 그것이다.



삼성이 추구하는 디자인 경영의 선두에는 삼성전자가 있다. 삼성전자는 제 2 디자인 혁명의 핵심 전략으로 아이코닉(Iconic) 디자인을 차별화 전략으로 삼고 있다. 아이코닉 디자인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제품의 모양과 기능을 차별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선도하고 상징성을 갖는 디자인을 창조해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디자인 분야에서 이름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유명 디자이너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생활가전총괄 금형팀과 생활가전총괄가전연구소에 금형디자인그룹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디자인경영센터, 해외디자인연구소, 삼성 디자인 학교를 중심으로 마케팅과 브랜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디자인 혁신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SADI, 디자인경영센터, 해외디자인연구소



삼성이 IT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해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는 것은 1991년, ‘삼성 소프트웨어 멤버십’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부터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 동안 1,500여명의 대학생을 우수 IT 인력으로 육성했고, 현재는 700여명이 소프트웨어 멤버십에 소속되어 있다. 이중 5명은 현재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1993년 설립된 삼성 디자인 멤버십도 디자인 경영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화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삼성 디자인 멤버십은 각 학교의 우수한 디자인 인재들을 선발해 다양한 실험과 상호 교류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삼성 디자인 멤버십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된 디자이너는 지금까지 350여명. 이 가운데 현재 200여명이 삼성전자에 입사해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삼성 디자인 멤버십은 독창성과 경쟁력으로 디자인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굿 디자인 어워드 2006(Good Design Award 2006)에서 심사위원장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삼성 디자인 학교라고 불리는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해외디자인연구소(Global Design Network), 디자인경영센터는 삼성 그룹의 강도 높은 디자인 경영의 핵심 축을 이루는 곳이다. 삼성이 추구하고 있는 디자인 경영, 디자인 혁명을 이끄는 디자인 두뇌 집단을 양성하거나 실무진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성이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면서 1995년 설립한 SADI는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이다. 미국 뉴욕의 파손스(Parsons)와 제휴를 맺고 선진화된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있다. 이론 보다는 실무 위주의 교육으로 실전에 강한 디자인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 SADI의 교육 목표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중국디자인연구소의 컨셉 디자인 휴대폰인 터치 메신저. 시각장애인을 위한 휴대폰으로 좌우로 6개씩 배열된 12개의 키패드를 이용해 점자를 입력할 수 있고, 점자가 표시되는 디스플레이를 내장해 수신한 문자메시지를 읽는 것도 가능하다.(사진:삼성전자)




2000년부터는 디자인 혁신 강화를 위해 삼성전자에서 SADI의 운영과 지원을 맡고 있다. 또한 작년에는 제품디자인학과를 신설해 자연과학이나 공학 등을 전공한 디자이너 지망생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산학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차별화된 디자인 교육 인프라를 육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SADI의 역할이다.



2001년 새워진 디자인경영센터는 CEO 직속이다. CEO가 주재하는 디자인위원회를 통해 디자인 전략을 수립하고,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디자인의 기본 컨셉이 이곳에서 태어난다. 고객들의 소비 패턴과 필요를 파악해 디자인을 상품 기획에 먼저 고려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는, 선(先)디자인 후(後)개발 전략을 추진하는 사령탑인 셈이다.



특히 혁신적인 제품 개발을 위해 디자인 뱅크 시스템도 활용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는 디자인을 개발하고 이를 뱅크 시스템에 저장한 후 정기적으로 활용 가능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을 먼저 만들어내고, 상품화가 가능한 기술력이 생겼을 때 이를 곧 바로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세계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삼성의 해외디자인연구소는 전 세계 5개국 6개 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해외디자인연구소는 삼성의 글로벌 디자인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상품 디자인과 함께 각국의 문화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 소속 디자이너인 김창덕씨가 디자인한 ‘모두의 화장실’. 가변형 디자인으로 성인뿐만 아니라 노약자, 장애인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화장실 컨셉 디자인이다.(사진:삼성전자)






10년 디자인 경영, 그리고 현재



디자인 경영을 강조한 삼성의 노력과 혁신은 곳곳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우선 삼성의 첫 번째 텐밀리언 셀러로 꼽히는 T100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1000만대 이상이 팔렸다. 이른바 이건희 폰으로 불린 T100은 프리미엄 브랜드로서의 삼성의 이미지를 알리고, 벤츠폰, 블루블랙폰 등을 텐밀리언 셀러의 반열에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객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와인이라는 컨셉을 채용해 LCD TV 시장에서도 선두 그룹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한 보르도 TV 시리즈도 빼 놓을 수 없는 디자인 경영의 산물이다. 아울러 다양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일례로 세계적인 디자인 공모전인 IDEA(Industrial Design Excellence Award)에서 97년 이후 35건의 디자인으로 수상한 경력이 있다. iF 디자인 어워드에서는 25개 제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2006년 가장 많은 수상작을 배출했고, 그 동안 개최됐던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가장 많은 수상작을 낸 기업이 되기도 했다.















그래픽 카드와 모니터를 연결하는 DVI 케이블을 사용하기 쉽도록 개선한 ‘신개념 DVI 잠금장치’. 삼성전자 디자인 멤버십 소속 윤반석씨가 레드 닷 디자인 컨셉 어워드에서 수상한 컨셉 디자인이다.(사진:삼성전자)




최근에는 ‘레드 닷 디자인 컨셉 어워드(Red dot award: design concept 2006)'에서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 삼성 디자인 학교, 삼성 디자인 멤버십 소속의 학생들이 출품한 5개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중에서 삼성전자 중국디자인연구소의 터치 메신저(Touch Messenger)는 레드 닷 컨셉 디자인 어워드와 함께 IDEA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특히 눈길을 끈다.



터치 메신저는 시각장애인들도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고안된 점자 휴대폰이다. 좌우로 6개씩 배열된 키패드를 조합하면 점자 형태의 문자를 입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슬라이드 방식의 점차 키패드를 밀어 올리면 드러나는 점자 디스플레이로는 수신한 문자를 점자로 읽을 수 있다.



올해 레드닷 디자인 컨셉 어워드에는 약 40여국에서 출품한 478개의 컨셉 디자인이 경합을 벌였다. 이중에서 60개의 레드 닷(red dot)과 12개의 레드 닷 최고 작품상(Red dot: best of the best)상이 선정됐다. 수상작에 대한 시상식은 지난 11월 24일 싱가폴에서 열렸다.

















삼성디자인 학교 박상현씨와 김지애씨가 디자인한 ‘봉봉 권투 기구’.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보조 기구로 사회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놀이기구를 생각하다 고안했다고 한다.(사진:삼성전자)




12개의 최고 작품상 가운데에는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 소속 디자이너인 김창덕씨의 ‘모두의 화장실(Universal Toilet)’가 포함되어 있다. 모두의 화장실은 성인 위주로 만들어져 있는 기존 화장실의 문제점을 가변형 디자인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해결해 장애인, 노령자, 어린이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컨셉 디자인이다.



최고 작품상은 받지 못했지만 60개의 레드 닷 수상작에 이름을 올린 4가지 작품도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신개념 DVI 잠금장치(New DVI Lock)는 삼성전자 디자인 멤버십 소속의 윤반석씨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래픽 카드와 모니터 케이블을 연결하는 DVI 단자의 착탈 방식을 편리하게 개선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폐형광등 재활용 기구(Waste Collection for Fluorescent Lamps)’는 ‘모두의 화장실’로 최고상을 수상한 김창덕씨의 또 다른 수상작이다. 이 작품은 폐형광등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수거해 환경 보호와 자원재활용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 덕분에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봉봉 권투 기구(Bong Bong Boxer)'는 이름만큼이나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컨셉 디자인으로 역시 수상작의 영예를 안았다. SADI 디자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상현씨와 김지애씨의 작품으로 사회성 강화를 위해 디자인된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보조기구이다.















폐형광등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수거해 환경을 보호하고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고안했다는 ‘폐형광등 재활용 기구’의 컨셉 디자인. ‘모두의 화장실’로 최고상을 수상한 김창덕씨의 레드 닷 일반 수상작이다.(사진:삼성전자)




감성 마케팅, 고객 감동이 제품과 기업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요인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디지털 시대의 트렌드다. 남 보다 한발 앞선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몇 발이나 앞서가는 기술에 한 시대를 미리 준비하는 디자인 안목이 있어야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는다.



이제 디자인은 단순히 상품을 포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첨단 기술이며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지난 10년간 디자인 경영을 강조한 삼성의 위상과 브랜드 가치가 세계 시장에서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삼성과 함께 국내 가전과 IT 기업을 대표하는 LG전자 역시 디자인 혁신에 쏟아 붓는 노력이 삼성 못지않다. 권위 있는 각종 디자인 공모전에서 삼성과 LG의 이름을 보는 것은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물론 바다를 건너 눈을 세계로 돌리면 이들을 앞서거나 바짝 뒤를 쫒는 기업들도 수 없이 많다.



어느 나라 국민들 보다 까다롭고 깐깐한 눈을 가진 우리나라 고객들의 높은 눈높이도 미래를 내다보면 우리 기업들의 자산이다. 좋은 디자인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디자이너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인정해주고 냉정하게 평가해 주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 고객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기술뿐만 아니라 디자인으로도 세계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리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