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발 2차 환경쓰나미, REACH

2006-11-29     이희욱

요즘 제조업체들은 호환, 마마보다 환경규제가 더 무섭다. 물건 하나 만들어 팔라치면 이곳 저곳에서 유해물질이네, 중금속이네 하며 곱잖은 시선을 보낸다. 예전처럼 생산공장을 마음놓고 쉼없이 돌리지도 못한다. 앞으로는 기후변화협약에 따라 정해진 온실가스 배출량을 초과하면 돈을 내고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사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올해 7월부터
유해물질 사용제한지침(RoHS) 시행에 들어갔다. 납이나 수은, 카드뮴 등 6종의 유해물질이 포함된 제품은 앞으로 유럽 수출을 포기해야 할 전망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납 대체물질 개발기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EU측에 유예기간을 2008년까지 확보했지만, 그 안에 제조업체들은 유해물질을 친환경 물질로 대체한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가운데 또 다른 유럽발 대규모 환경규제로 제조업체에 비상등이 켜졌다. EU의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zation of CHemicals) 얘기다. 



REACH는 EU가 기존의 화학물질 관리제도를 전면 개편해 EU로 들어오는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산업계가 직접 위해성 정보를 생산·등록하는 제도다. 2003년 10월 EU 집행위원회에서 초안이 발표된 이후 2년여 토론을 거쳐 올해 11월14일 EU 전체회의에서 압도적 지지로 수정안이 채택됐다. 이대로라면 EU 회원국 승인과 의회투표를 거쳐 2007년 4월께 시행에 들어갈 전망이다.



그렇지만 국내 제조업체에 REACH는 아직까지 생소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자사 제품에 어떤 물질이 들어있는지, 이 가운데 EU내 수출을 위해 등록이나 허가를 거쳐야 하는 물질은 어떤 것인지조차 아리송하기만 하다. 등록이나 허가 절차에 대한 정보도 없다. 이대로 해를 넘기면 당장 내년부터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EU 수출길에 구멍이 숭숭 뚫릴 판이다.



정부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주무부처인 환경부는 지난 9월 'REACH 대응추진기획단'을 발족해 산업계 지원안을 마련하고 관련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11월28일에는 산업계 실무자들이 이에 올바르게 대처하도록 돕고자 '제1회 산업계 대상 REACH 세미나'도 열었다. 한국과학기술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는 250여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자리를 꽉 메워, 곧 닥쳐올 'EU발 환경 쓰나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화학물질 사전등록 놓치면 수출길 타격



REACH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등록'(R)과 '평가'(E), '허가'(A)로 나뉜다. 이 가운데 제조업체 입장에서 가장 신경써야 할 대목은 '등록'이다. 



REACH가 시행되면 EU에서 연간 1톤 이상 생산하거나 수입되는 화학물질은 반드시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연간 100톤 이상의 화학물질은 등록 이후에도 별도의 평가를 거쳐야 하는데다, 유럽 화학물질청(ECA)에서 요구하는 의무도 추가로 준수해야 한다. 등록기간은 물질의 종류와 양에 따라 3·6·11년의 3단계로 나뉜다. 특히 'CMR'라 불리는 발암물질(C), 돌연변이물질(M), 유전독성물질(R)은 연간 1톤 이상 유럽으로 수출하려면 3년 이내에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 CMR에 포함되지 않는 화학물질이라 하더라도 연간 100톤 이상을 수출한다면 3년 안에 등록해야 한다. 즉 수출량이 많거나 유독성 물질일수록 빨리 등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학물질'에는 이를 원재료로 한 완제품도 포함된다.



'빨라야 3년 뒤'라고 하니 당장은 느긋해할 지도 모르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사전등록'이라는 절차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가 시행되고 나면 연간 1톤 이상의 화학물질만 수출하려 해도 12~18개월안에 사전등록을 거쳐야 한다. 사전등록을 하면 화학물질 정보교환 포럼(SIEF)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포럼을 통해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나눌 기회를 갖는다. EU의 화학물질 규제정책을 오랫동안 연구한 세이프케미컬의 정옥선 박사는 "사전등록은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이를 하지 않을 경우 '한 배에 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므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전등록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REACH에 화학물질 등록을 거쳐야 하는 대상은 EU 내 제조업체다. EU쪽 수출업자인 국내 업체들은 직접 등록대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 비 EU 제조업체나 수입업체는 대리인을 통해 등록해야 한다. 국내 업체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도 여기다. 



정옥선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수출업자인 우리나라 기업은 화학물질 등록대상이 아니므로 REACH와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는데요.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REACH의 기본 목적은 유해물질 그 자체도 알고 싶어하지만, 기본적으로 유해물질의 유통시장을 얼마나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지, 누가 어떤 용도로 이를 사용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내 기업이 EU쪽 수입업자에게 유해물질 자료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 수입업자로선 한국제품을 굳이 사려 하지 않겠죠. 결과적으로 EU 시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수동적 대응 넘어 신규시장 창출 기회 삼아야



REACH는 국내 제조업체 입장에서 볼 때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하는 족쇄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경규제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이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기업도 환경규제를 더이상 경제활동의 걸림돌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일 때다. 



박영우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은 "지금까지는 기업이 환경규제 기준을 지키는 데 만족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규제는 누구나 지키므로, 이를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기업경쟁력을 제고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REACH는 먼 미래의 위협이 아니라, 눈 앞의 규제이자 새로운 기회다. 환경부는 우선 REACH 대응센터 홈페이지를 개설해 관련 정보와 일정을 공유하면서 기업체들과 함께 대응전략 마련에 나섰다. 당장은 EU 수출기업들이 REACH 규제에 적절히 대처하도록 돕는 게 목적이지만, 이를 계기로 국내 화학물질 종합 관리체계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온라인 실시간 상담이나 정보공유 커뮤니티 코너도 제공한다. 대한상공회의와 KIST도 산업계 실무진과 CEO들을 대상으로 REACH 정보공유와 공동대응을 위한 'REACH 대응을 위한 산업계 협의체'(가칭) 포럼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