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니컬 히스토리] 사노피 미완의 당뇨신약, 한미약품 'H.O.P 포석'으로 부활
사노피에 기술수출(LO)됐다가 반환된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신약 후보물질 '에페글레나타이드'가 한미약품 손에서 다시 당뇨 임상3상에 도전한다. 글로벌 임상에서 좌절됐던 프로젝트가 비만 단일 적응증의 한계를 넘기 위해 당뇨·심혈관·신장질환까지 아우르는 통합 대사질환 포트폴리오로 재편되는 셈이다. 다만 국내 당뇨 시장은 제네릭과 저가 약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만큼 새로운 기전 신약으로 상업적 성과를 입증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로 떠오른다.
비만 넘어 대사질환 통합 포트폴리오로
9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은 9월 30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2형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에페글레나타이드와 나트륨-포도당 공동수송체 단백질-2(SGLT-2) 저해제, 매트포르민(MET) 병용요법의 혈당조절 효과를 평가하는 3상 임상시험계획(IND)을 제출했다. 현재 한미약품은 국내 성인 비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3상 IND에서 448명의 대상자 등록을 완료했다.
시장에서는 에페글레나타이드의 당뇨 3상 재개를 두고 한미약품이 글로벌 GLP-1 비만 시장에서 후발주자로서 차별적 입지를 찾기 위해 내린 전략적 선택이라고 해석한다. 이미 전 세계 시장을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가 장악해 비만 시장만으로는 성과가 제한적이라는 판단이다. 이 때문에 당뇨·심혈관·신장질환까지 확장해 대사질환 통합 포트폴리오로 외연을 넓히려는 포석을 꾸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미약품이 자신감을 얻은 배경에는 과거 사노피와 진행했던 글로벌 대규모 임상 경험과 현재 국내 비만 3상 데이터 축적이 있다. 사노피 시절 6000명 규모 임상에서 일정 수준의 혈당 조절 가능성을 확인한 바 있고, 관련 결과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NEJM), 써큘레이션(Circulation) 등 주요 학술지에도 다수 등재됐다. 최근 국내 비만 3상에서도 체중 감소 및 대사 지표 개선 데이터를 축적하며 당뇨 적응증 확장의 근거를 강화하는 중이다.
권리반환 후 H.O.P 핵심자산으로 부상
에페글레나타이드는 한미약품이 자체 플랫폼 '랩스커버리'를 기반으로 개발한 지속형 GLP-1 계열 신약 후보물질이다. 체내에서의 반감기를 크게 늘려 주1회 투여만으로도 지속적인 혈당 조절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GLP-1 계열은 혈당을 낮추고 체중을 줄이는 이중효과가 있어 전 세계 제약사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분야다. 에페글레나타이드는 이 같은 경쟁구도 속에서 국내 최초로 개발된 후보물질로, 한미약품이 글로벌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온 전략적 자산이다.
이 후보물질은 2015년 사노피에 기술수출되며 글로벌 무대에 진입했다. 사노피는 6000명 규모의 대형 임상을 설계하며 당뇨 치료제로 상용화를 추진했으나,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가 잇달아 GLP-1 계열 약물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경쟁이 과열된 것도 부담요인이었다. 상업성 판단이 바뀐 사노피는 2020년 권리를 한미약품에 반환했고, 프로젝트는 미완의 상태로 남게 됐다.
한미약품은 권리반환 이후 에페글레나타이드를 접지 않고 새로운 전략 구도 속에 재배치했다. 비만·대사질환을 집중 육성하는 '한미 비만 파이프라인(H.O.P)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이 후보물질을 대표 파이프라인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H.O.P 프로젝트는 비만 치료제 단일 적응증 개발에 머무르지 않고 당뇨·심혈관·신장질환까지 확장하는 한국형 대사질환 포트폴리오 구축을 목표로 한다. 에페글레나타이드는 그 첫 시험대이자 핵심자산으로서, 실패했던 글로벌 딜의 유산을 한미약품 고유의 전략 속에서 다시 살려내는 사례로 평가된다.
제네릭·저가약 위주 시장 진입장벽 관건
다만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앞길에는 부담요인도 남아 있다. 비만 3상이 아직 종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뇨 3상까지 동시에 진행하면서 연구 인력·비용이 분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GLP-1 계열 임상은 대규모 환자 모집과 장기 추적이 필요해 비용·기간 소요가 크다는 점도 리스크다. 게다가 그동안 국내 당뇨 시장은 디펩티딜펩티디아제-4(DDP-4) 억제제 등 제네릭과 저가 약제가 중심을 이뤄왔다. 이로 인해 새로운 기전 신약의 상업적 성과를 입증하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시장에서는 한미약품이 글로벌 선두주자와의 시간·지원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고, 임상 성과를 조기에 입증할지가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동시에 임상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될 경우 에페글레나타이드가 국산 최초의 GLP-1 계열 대사질환 치료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미약품이 '평택 스마트플랜트'라는 생산 인프라를 기반으로 안정적 공급 역량을 확보해둔 점은 긍정적인 전망에 힘을 보탠다. 이를 바탕으로 H.O.P를 통해 비만에서 출발해 적응증을 확장하는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 중이다.
한미약품은 올해 하반기 중 에페글레나타이드의 국내 비만 3상을 마무리하고 내년 하반기에 국내 출시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김나영 한미약품 신제품개발본부장(전무)은 "에페글레나타이드는 비만을 넘어 당뇨와 심혈관·신장질환 등 다양한 대사질환으로 치료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혁신신약"이라면서 "이번 임상3상을 통해 환자들에게 보다 폭넓은 치료 기회를 제공하고 글로벌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혁신성과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