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데자뷰' 국내 PEF 위축, 외국계는 우량기업 싹쓸이 [넘버스]
최근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정부와 여론의 압박 속 대형 딜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IMF 당시 외국 자본이 국내 우량자산을 대거 인수하면서 불거진 국부 유출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당시 해외 펀드들은 은행과 통신, 식음료 등 핵심 산업의 선두권 업체를 무더기로 인수했다. 국내 자본은 자금 조달 여력이 부족했고 규제에 갇혀 이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외 펀드들은 막대한 수익을 챙겼고 그 여파로 국부 유출 논란이 제기되면서 사회 전반을 달궜다.
대표적 사례가 뉴브리지캐피탈의 외환은행 인수다. 1999년 IMF 직후 뉴브리지는 외환은행 지분 51%를 약 2조원에 인수했다. 이후 HSBC에 매각하려는 시도가 무산됐지만 2006년 론스타에 결국 지분을 넘기면서 막대한 차익을 실현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펀드의 먹튀 논란이 확산했고 국부 유출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OB맥주 매각 사례도 빠지지 않는다. 1998년 두산그룹이 경영난으로 OB맥주를 외국계에 매각했고 2009년 다시 KKR에 넘어간 뒤 재상장과 재매각을 반복했다. 소비재 브랜드가 외국 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현재 국내 바이아웃 시장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MBK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 홈플러스 부실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국내 PE들을 바라보는 여론이 악화됐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주요 LP(유한책임투자자)들은 정부 정책과 여론을 의식해 PE 출자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영권 매각을 포함한 바이아웃 출자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사모펀드 운용사들은 민생과 직결된 업종을 기피하고 크레딧(credit)과 그로쓰(growth) 등 소규모 투자에만 나서는 실정이다. 특히 프랜차이즈, 외식·식음료(F&B) 업종은 가격 인상과 가맹점 분쟁 리스크로 정부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투자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때 MBK파트너스, VIG파트너스, IMM PE 등이 BBQ, 버거킹, BHC, 할리스커피 등 굵직한 프랜차이즈 딜을 성사시켰지만 지난 5년간 거래는 전무하다.
국내 운용사들이 규제 리스크를 우려해 발을 빼는 사이 외국 운용사들이 공백을 메우고 있다. KKR은 무신사에 240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단행해 소비 브랜드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 EQT는 폐기물·재활용 플랫폼을 인수해 인프라 시장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칼라일, 베인 등도 제조업·IT 등 분야에서 영역을 점차 넓히고 있다. 국내 PE들이 정부 규제와 여론 악화로 발목이 잡힌 사이, 해외 자본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바이아웃 시장에서는 역차별 논란마저 불거진다. 외국 운용사들이 기업을 되팔거나 IPO로 자금을 회수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반면, 국내 운용사들은 민생과 직결된 기업의 자산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고 품질을 저하시켰다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IMF 시절부터 외국계를 투자자로 부른 반면, 국내 자본은 투기 세력으로 낙인 찍었던 현상이 반복되는 셈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지금처럼 LP가 정부 눈치를 보고 국내 운용사가 민생 딜을 기피하는 구조가 고착되면 바이아웃 시장은 장기적으로 외국계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며 "국내 자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외국 자본은 규제 자유와 막강한 자금력을 무기로 존재감을 더 키워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