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온산제련소, 비철금속공장서 '전략광물' 핵심 기지로 [현장+]

2025-10-16     온산(울산)=최지원 기자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직원이 인듐을 주조하는 모습. /사진=최지원 기자

 

울산 울주군의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짙은 해무 속에 묵직한 금속 냄새가 감돌았다. 배관 사이로 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제련로의 미세한 진동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반세기 동안 멈춘 적 없는 거대한 공장은 이날도 숨 고를 틈 없이 뛰고 있었다.

1978년 고려아연이 온산제련소를 세울 당시만 해도 한국은 자원 빈국이었다. 그로부터 50년 뒤 이곳은 세계 최대 단일 아연 제련소이자 전략광물 공급망의 전초기지로 눈부시게 도약했다. 중국이 전략자원의 수출을 무기화하고 미국이 공급망 재편에 나선 오늘날 국가 자원 안보와 첨단 산업을 지탱하는 기반으로 재조명 된 것이다. 이달 14일 찾은 온산제련소는 그 변화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아연부터 안티모니까지…전략광물 공정 살펴보니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인듐 주조 공정이다. 4조 1교대로 14명의 인원이 24시간 공정을 돌리며 고순도 인듐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인듐은 반도체, 태양광,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고순도 전자소재다.

작업자는 얼굴을 반쯤 가린 방진 마스크와 두꺼운 장갑을 착용한 채 녹아내린 인듐을 긴 주걱으로 떠올리며 점도를 확인했다. 흘러내린 은빛 금속이 식으면서 순간적으로 하얀 연무가 피어올랐다. 고열 속에서 녹였다가 식히기를 반복하는 작업은 단조롭지만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금 틀에서 꺼낸 인듐 잉곳이 식으며 표면에 미세한 무늬가 맺혔다. 눈앞의 인듐은 잘 굳은 초콜릿 바처럼 단단하고 반듯했다.

과거 액정표시장치(LCD) 전성기 시절 한 차례 주목받았던 인듐은 이제 다시 인공지능(AI) 반도체와 차세대 박막 태양전지, 투명전극 소재로 부활했다. 전종빈 전자소재팀 책임은 "5kg짜리 인듐 한 덩어리의 시세가 약 250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고려아연이 온산제련소에서 생산한 인듐 괴. 한 덩어리 시세는 250만원 정도다. /사진=최지원 기자

 

아연 주조 공장은 온산제련소 전체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다. 작업장 곳곳에는 고객사별로 구분된 금형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각기 다른 두께, 깊이, 표면 패턴을 지닌 금속들이다. 표준화가 불가능한 현장이었다. 고객사가 원하는 제품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무겁고 거친 금속이지만 모든 공정을 거친 아연 잉곳은 의외로 반듯하고 매끄럽다. 손으로 만지면 미세한 입자들이 남을 만큼 부드럽다. 온산제련소에서 생산되는 아연의 약 70%는 해외로 수출된다. 일본, 미국, 유럽 등지로 나가 자동차 강판, 도금 철강, 전선 피복 등으로 다시 쓰인다. 국내에서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주요 철강사에 공급된다.

이 정교한 품질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제련 기술의 깊이에서 나온다. 고려아연이 독자 개발한 '저온·저압 헤마타이트 공정'은 기존 자로사이트(Jarosite)나 페라이트(Ferrite) 방식보다 낮은 온도와 압력에서 철(Fe)을 제거해 아연 회수율을 99%까지 끌어올린다. 

유가금속 손실을 최소화하고 폐기물을 줄이는 이 공정은 올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됐다. 세계적으로 상용화에 성공한 기업은 고려아연이 유일하다. 현장에서 만난 김승현 온산제련소장(부사장)은 "단순한 공정 혁신이 아니라 자원 주권과 직결되는 기술"이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서 생산한 아연괴. /사진 제공=고려아연

 

안티모니 공정 라인에 들어서자 회색빛 금속 덩어리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삼각뿔 형태의 잉곳들은 띠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표면에는 유리막처럼 번들거리는 광택이 감돌았다. 빛이 닿을 때마다 푸른색과 황금색이 섞인 금속결이 미묘하게 일렁였다.

안티모니는 온산의 새로운 전략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탄약, 방호합금, 방위 전자장비 등에 쓰이는 필수 금속인데, 고려아연은 국내 유일의 안티모니 생산기업이다. 연간 생산량만 약 3500톤에 달한다.

고려아연은 올해 6월부터 미국 메릴랜드 볼티모어항으로 안티모니 직접 수출을 시작했다. 8월에는 두 번째 선적이 이뤄졌고 9월에는 국내 화학사와 협업해 재가공 후 미국으로 수출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정한 국가자원안보 핵심광물 가운데 안티모니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은 고려아연이 유일하다. 황윤근 귀금속팀 파트장은 "올해 초부터 안티모니 가격이 6배 뛰었다"며 "중국과 타협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가격은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글로벌 공급망 전면에 선 고려아연

고려아연의 기술력은 이제 지정학적인 한 가운데로 옮겨가고 있다. 세계 각국이 전략광물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 고려아연은 한국의 자원 주권을 기술로 확장하고 있다. 온산제련소 게르마늄 공장은 그 중심에 있다.

2026년 착공을 목표로 한 이 공장은 약 140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2028년 상반기 가동이 시작되면 고려아연은 연간 10톤 규모의 고순도(5N) 게르마늄을 생산하게 된다. 게르마늄은 반도체, 위성용 태양전지, 열화상 센서 등 방산과 우주 산업의 핵심 소재로 전 세계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대표적 전략광물이다. 온산제련소는 이 희소금속을 부산물에서 정제해내는 기술로 자원 자립의 출발점을 만들고 있다.

성과도 있다. 고려아연은 올해 미국 방산기업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는 단순한 자원 거래를 넘어 지정학적 공급망의 재편에 한국이 참여했다는 신호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리스크 지역을 대체할 생산 거점을 찾던 미국의 이해와 비철금속 첨단화를 통해 기술 주권을 강화하려는 한국 기업의 전략이 맞물린 결과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전경. /사진 제공=고려아연

 

현장에서 본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단순한 비철금속 생산지를 넘어 국가 안보와 첨단산업이 교차하는 전략소재의 심장부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제되는 게르마늄, 안티모니, 인듐, 비스무스 등 다양한 광물은 반도체와 방위산업, 우주기술의 핵심 재료로 다시 태어난다. 산업의 후방에 머물던 제련이 이제 글로벌 공급망의 전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김승현 온산제련소장은 "중국을 제외하고 다양한 전략금속을 이처럼 한 곳에서 상업화한 기업은 드물다"며 "글로벌  톱티어 고객사들이 우리 고려아연을 찾은 이유일 것"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