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위기론' 속 故 이건희 5주기…예술과 생명으로 이어진 KH 유산
'삼성 위기론'이 드리운 가운데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5주기 추도식이 이달 24일 경기도 수원 가족 선영에서 열린다. 이날 행사에는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명예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 등 유족들이 참석한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오세철 삼성물산 사장, 홍원학 삼성생명 사장을 비롯한 전·현직 삼성 경영진 150여명도 함께 고인을 기린다.
추도식 후 이 회장과 사장단은 경기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으로 자리를 옮겨 오찬을 함께하며 선대회장이 남긴 경영철학과 유산의 의미를 되새길 예정이다. 'KH 유산'이라 불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문화의 품격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문화 소양이 자라야 한다"
유족은 2021년 고인의 뜻에 따라 문화·의료 분야에 총 1조원을 사회 환원했다.
이 선대회장은 생전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 소양이 자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는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하더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2만3000여 점의 미술품·문화재 기증이다. 국보 14건, 보물 46건을 포함한 고미술품 2만1600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 1600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전달됐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 이중섭의 <황소> 등 한국 미술사의 정수가 공공의 자산이 된 것이다.
문화계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국내 고미술과 세계적 서양화, 한국 근대미술의 걸작들을 한데 모아 국민에게 돌려준 전례 없는 문화 환원"이라고 평가한다.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을 통해 국민이 높은 수준의 문화적 경험을 향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순회전 이후 한국 미술시장이 급성장하고 해외 화랑과 컬렉터들이 한국 미술에 주목하면서 국내 작가들의 세계 진출 기회가 넓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아트뉴스페이퍼에 따르면 이건희 컬렉션 효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2022년 세계 5대 관람객 방문 박물관에 올랐다.
이건희 컬렉션은 올해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전시되며 이후 시카고미술관(2025년 3~7월), 영국 대영박물관(2025년 9월~2027년 1월)으로 이어진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해외 순회전은 한국 미술의 세계적 가치 확산을 목표로 한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 한국 거장들의 작품이 주요 전시에 포함되면서 그간 서구 미술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한국 근현대 미술의 위상이 새롭게 부각될 것으로 기대된다.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은 우리의 사명"
이 선대회장의 또 다른 유산은 의료 분야다. 유족은 "어린이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은 우리의 사명"이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소아암·희귀질환 치료와 감염병 대응 인프라 구축에 총 1조원을 기부했다.
이 중 3000억 원은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에 쓰였다. 이를 기반으로 서울대어린이병원을 비롯한 전국 160여개 의료기관이 참여한 사업단이 출범했다. 지금까지 2만2000명 이상의 환아가 지원을 받았다. 약 1만명은 병명을 진단받았으며 4000명은 치료를 시작했다. 이재용 회장과 홍라희 명예관장은 지난해 10월 서울대어린이병원에서 열린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 행사에 직접 참석해 환아와 가족, 의료진을 격려하기도 했다.
유족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받던 2021년에는 감염병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7000억 원을 추가 기부했다. 이 가운데 5000억 원은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에 투입된다. 해당 병원은 일반·중환자 병상과 고도 음압병상, 음압수술실, 생물안전 검사실 등을 갖춘 150병상 규모의 첨단 의료시설이다. 2028년 완공을 목표로 이르면 내년 착공에 들어간다.
나머지 2000억원은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연구시설 확충과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인프라 조성에 사용되고 있다. 의료계는 "이건희 유산은 감염병 대응을 일시적 복지가 아닌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꾼 출발점"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의 기부 이후 사회 곳곳에서 기부 선순환이 확산됐다. BTS 정국은 2023년 10억원을, 가수 이승기는 2022년 20억원을 각각 서울대어린이병원에 기부했다. 삼성의 스마트공장 지원을 받아 성장한 감염병 진단키트 기업 코젠바이오텍도 2022년부터 매년 소아암 환아를 위해 후원해 3년간 누적 기부금이 2억5000만원에 달한다.
삼성 한 관계자는 "'KH 유산'은 이처럼 거대한 자본의 나눔을 넘어 대기업과 개인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연대의 문화를 확장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