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리더십 3년]① 'KH의 기술 JY의 실행'…삼성 DNA의 진화
이재용 체제 3년, 변화의 궤적을 따라 삼성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합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7일 취임 3주년을 맞았다. 지난 3년은 '기술삼성'의 토대 위에 '실용삼성'이라는 새로운 경영 질서를 세운 시기로 평가된다.
부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이 생산 혁신과 기술 축적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개척했다면 이 회장은 협력과 실행을 앞세워 글로벌 네트워크 경영의 지평을 넓혔다. 여기에 테슬라, 엔비디아, 오픈AI 등 글로벌 빅테크와의 연합을 강화하며 인공지능(AI) 전환기에 맞는 실용적인 성장 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22조 테슬라 수주로 증명, 삼성의 '실행 중심 경영'
이 회장의 글로벌 행보는 기술력에 기반한 '실행 가능성' 확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도체 시장에서 수율과 공정 경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안정적인 고객 기반과 파트너 네트워크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2022년 10월 취임 직후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창업 이래 가장 중시한 가치는 인재와 기술이며,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삼성은 기술을 고객과 공급망에 연결해 상업화 속도를 높이는 전략을 병행했다.
이러한 기조는 파운드리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전략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삼성은 단기적인 미세공정 성과나 수율 경쟁에 치중하기보다 글로벌 고객사와의 장기 공급 계약, 첨단 패키징 기술의 내재화, 납기 신뢰도 제고 등 실행력 중심의 경쟁력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경쟁사인 대만 TSMC가 선단 패키징 캐파 확대를 통해 공정 기술의 한계를 앞당기는 전략을 택했면 삼성은 제품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생산·공급 전 주기 통합(턴키) 실행체계 개선을 병행하고 있다. 이는 기술 혁신을 성과로 연결하는 현실적 경영 방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실용 경영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이 전략이 실질적 성과로 확인된 사례가 테슬라 수주다. 삼성전자는 올 7월 약 165억달러(약 22조77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급 계약을 공시했다. 파운드리 사업부가 확보한 단일 고객 계약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거래 상대방은 직접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사회관계망서비스 X(옛 트위터)를 통해 협력 사실을 언급하며 수주처가 확인됐다.
삼성전자는 이번 계약으로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 칩 'HW 4.0'에 이어 차세대 'AI6' 칩을 2033년까지 위탁 생산한다. AI6는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 플랫폼 성능을 대폭 끌어올릴 핵심 반도체로 전 세대 대비 연산 처리량이 크게 향상된 초고성능 칩이다. 생산지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신규 파운드리 공장으로 첨단 3나노(㎚) GAA 공정과 고효율 패키징 기술이 동시에 적용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행보를 '삼성의 선단공정 투자와 글로벌 고객 개발이 결실을 맺은 신호'로 해석한다. 삼성은 지난 수년간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과 HBM기술 고도화에 수십조원을 투입해 왔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 둔화로 파운드리 가동률이 하락하면서 적자가 이어졌다.
테슬라 대형 수주는 글로벌 고객 신뢰 회복과 동시에 삼성의 선단공정 기술력이 다시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장에서는 이번 계약을 계기로 하반기부터 파운드리 사업이 손익분기점(BEP) 회복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텍사스 테일러 공장 역시 시험 가동 단계를 넘어 주요 고객 대응을 위한 본격 양산 체제 전환이 임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동맹으로 '뉴삼성' 막 여는 이재용
이 회장은 미래 신사업 확장에서도 행보를 넓히고 있다. 그는 올해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의혹' 사건에서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으며 10년 가까이 이어진 사법 리스크를 완전히 털어냈다. 이를 계기로 해외 주요 인사와의 접촉을 늘리며 글로벌 네트워크 복원을 본격화했다.
특히 AI 전환기를 대비한 기술 협력에 집중하면서 미국, 유럽, 아시아를 무대로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년간 엔비디아의 젠슨 황, 오픈AI의 샘 올트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등 주요 AI·IT 기업 최고경영자들과 연쇄적인 회동을 가졌다. 이는 단순한 투자 논의를 넘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삼성의 영향력을 복원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된다.
특히 젠슨 황과의 회동은 삼성의 반도체·AI 전략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삼성은 그동안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 D램(GDDR)을 공급하고 일부 파운드리 위탁생산도 수행해왔다. 하지만 AI 가속기용 HBM 공급망 주도권에서는 경쟁사에 밀려 있었다.
올 8월 성사된 이 회장과 황 CEO의 만남을 계기로 양사는 HBM3E 이후 차세대 HBM4 협력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는 이 회동을 삼성이 AI 가속기 및 메모리 생태계에서 단순 공급자를 넘어 실질적 파트너로 자리잡으려는 신호로 보고 있다.
오픈AI와의 협력도 구체화되고 있다. 이달 1일 이 회장은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만나 글로벌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전략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삼성전자·삼성SDS·삼성물산·삼성중공업 등 주요 계열사가 AI 서버·에너지 인프라·클라우드 관련 분야 협력을 위한 의향서(LOI)를 체결했다. 오픈AI가 월 90만장 수준의 AI용 D램 웨이퍼 수요를 내다보면서 삼성은 HBM과 차세대 서버 D램의 안정적 공급을 통해 글로벌 AI 인프라 확충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이 같은 글로벌 연합과 대형 거래들은 모두 이 회장이 추진 중인 '뉴삼성' 전략의 가시적 결과로 평가된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 속에서 삼성이 독자 기술 경쟁 대신 협력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재정립하려는 구상이다.
삼성 관계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협력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겠다"며 "AI·반도체·친환경 에너지 등 주요 분야에서 지속 가능한 사업 기반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