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다르파' 그리는 삼성, 미래기술육성사업이 쌓은 12년 [현장+]
1958년 미국 국방부 산하의 작은 조직 하나가 세계 기술의 판도를 바꿨다. 바로 미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다르파)이다. 인류가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GPS로 길을 찾고, 자율주행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 출발점에는 다르파의 실험과 혁신이 있었다. '실패 확률이 높을수록 시도한다'는 다르파의 연구개발(R&D) 철학은 오늘날 미국의 기술 패권을 떠받치는 근간이 됐다.
삼성의 '미래기술육성사업'은 이 같은 다르파 모델을 민간 차원에서 구현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단기 성과보다 창의성과 도전성을 중시하며 기초과학·소재·ICT 융복합 등 국가 핵심기술의 씨앗을 뿌려왔다.
연구 성과의 확장…'열린 포럼'으로 도약
삼성은 7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호텔에서 '미래기술육성 사업 2025 애뉴얼 포럼'을 개최했다. 올해로 12년째를 맞은 이 사업은 삼성의 대표적인 사회공헌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가 아닌 기업이 기초과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연구자들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온 점이 높이 평가된다.
삼성은 '기술중시'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201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간 주도 기초과학 연구지원 공익사업인 미래기술육성사업을 시작했다. 총 1조5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12년간 누적 880개의 연구 과제를 선정하고 지금까지 1조1419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 과제에는 91개의 기관과 연구 인력 약 1만6000여명이 참여했다. 약 1200명의 교수뿐만 아니라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1만4000명에 달하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연구에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실험 장비와 재료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은 학계와 업계 전문가들이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과제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하기 위해 2014년부터 애뉴얼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포럼은 한층 특별하다. 삼성은 올해 행사를 외부에 처음으로 공개해 학계·산업계 전문가들의 교류의 폭을 넓혔다. 여기에 '미래과학기술 포럼'을 신설해 참가자들이 양한 의견을 나누고 기술 동향과 발전 방향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포럼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삼성 미래기업육성사업이 보여준 진정한 의미는 성과 그 자체를 넘어 과학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왔다는 데 있다"며 "민간의 자율적 연구 지원이 국가 과학기술 생태계를 떠받치는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은 "진정한 기술은 인간의 삶을 바꾸는 기술이어야 한다"며 "삼성 미래기술육성사업은 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 세대의 연구가 다음 세대의 꿈이 되고 그 꿈이 다시 새로운 연구의 씨앗이 되는 선순환의 길을 삼성은 꾸준히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정책은 새로움에 집중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기초과학의 토대를 오래 지켜온 삼성의 행보는 의미가 깊다"고 강조했다.
연구에서 창업으로…'기초과학의 산업화' 실현
삼성 미래기술육성사업은 단순한 연구비 지원을 넘어 연구자 성장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연구자들은 선발 이후 삼성으로부터 단계별 전문가 멘토링, 산업계와의 기술 교류, 나아가 기술 창업까지 이어지는 전주기(全週期) 지원 패키지를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 65개 연구 과제가 실제 창업으로 이어졌다.
대표 사례가 서울대 윤태영 교수가 창업한 '프로티나(PROTINA)'다. 윤 교수팀은 2014년부터 5년간 미래기술육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신약 후보 물질을 빠르게 탐색하는 고속 항체 스크리닝 플랫폼의 기초를 완성했다. 당시 상업화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투자자들이 주저했지만 삼성은 연구를 꾸준히 지원했다.
이 과감한 지원은 현실이 됐다. 프로티나는 올 7월 코스닥 상장에 성공하며 기술 상용화의 결실을 맺었다. 삼성의 기초과학 투자가 단순한 연구 지원을 넘어 시장에서 검증된 기술자산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현재 프로티나는 최근 삼성바이오에피스, 서울대 연구진과 협력해 인공지능(AI) 기반 항체 신약 개발 관련 국책과제의 주관 연구기관으로 선정됐다.
김현수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센터장(상무)은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은 기초과학 발전과 산업기술 혁신에 기여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과학기술인 육성·배출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며 "올해 포럼은 첫 외부 공개 행사로 진행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