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정현호]① 사법리스크 해소 이재용의 결단, ‘뉴삼성’ 초석 정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수년간 이어진 사법리스크가 해소된 뒤 정현호 부회장이 용퇴를 결정했다. 정 부회장은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사업지원TF장으로서 그룹 내 이슈와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를 컨트롤해왔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던 수장이 교체되면서 이 회장 중심의 ‘NEW 삼성’이 본격화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달 7일 정 부회장이 사업지원TF장에서 회장 보좌역으로 위촉 업무가 변경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사업지원TF는 사업지원실로 격상됐으며 박학규 사장이 초대 사업지원실장을 맡게 됐다.
삼성 위기론, 그룹 2인자의 용퇴
정 부회장의 용퇴는 삼성전자 안팎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정 부회장은 2017년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사업지원TF장을 맡아 계열사 간 이슈 조율, 경영전략 수립 등을 지휘했다.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 족쇄로 발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삼성의 2인자로서 주요 의사결정 및 리스크를 관리를 주도해왔다.
이 회장의 부재 기간 동안 삼성에는 수차례 위기론이 제기됐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강조했던 기술 초격차 정신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날선 비판도 제기됐으며 그룹 안팎에서 조직문화와 소통 방식에 대한 문제점도 나왔다. 재계에서는 현재의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대응에 실패해 SK하이닉스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도 결국 사법리스크에 따른 이 회장의 리더십 부재에서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삼성 위기론의 또 다른 배경으로는 재무·관리 조직의 비대화가 거론됐다. 리더십 부재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사업지원TF를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이곳은 대부분 재무·관리 인사들이 자리했다. 재무·관리 인사들 중심의 의사결정으로 기술 혁신보다는 효율성, 오너의 사법리스크에만 집중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위기론은 오래 전부터 제기됐지만 삼성이 스스로 이를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24년 10월 8일 삼성의 최고 경영진인 전영현 대표이사(부회장)는 3분기 실적발표에서 이례적으로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전 부회장은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며 “많은 분들께서 삼성의 위기를 말씀한다. 이 모든 책임은 사업을 이끌고 있는 저희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도 올해 초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메시지에서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다”며 “판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현상 유지에 급급하며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위기 상황에서도 삼성은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로 발목을 잡혔기에 그간 공격적인 인사나 변화를 시도하기 어려웠다. 삼성은 2024년 연말 인사에서 정 부회장과 한종희 부회장 모두 유임시키며 안정에 방점을 뒀다.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경영안정에 보다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뉴삼성 구상 속도, 사장단 인사 주목
이 회장은 올해 7월 대법원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 의혹과 관련해 최종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사법리스크를 해소했다. 이번 정 부회장의 용퇴는 이 회장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문제가 해소되면서, 경영 정상화에 속도를 내기 위한 이 회장의 결단과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삼성은 8년간 지속됐던 비상경영체제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뉴삼성 구상에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정 부회장의 문책성 경질 해석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업도 안정권에 올라왔고 실적 개선세가 나타나고 있으며 협업과 인수합병(MOU)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어 정 부회장 본인이 후배 양성을 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 보좌역을 맡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부회장 체제의 사업지원TF는 과거 미래전략실과 조직 규모나 인력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했다. 조직 자체도 정식 조직이 아닌 한시적 TF로 구성됐기에 기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너십 부재 속에서 정 부회장이 모든 리스크를 관리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직개편의 후속으로 진행될 삼성 사장단 인사와 조직개편에서는 이 회장의 의중을 대략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선 이 회장이 올해 초 ‘사즉생(死則生)의 각오’와 ‘혁신’을 강조한 만큼 큰 폭의 인사와 변화가 예상된다. 다만 정 부회장의 후임으로 같은 재무·관리 라인이자 삼성전자의 전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박학규 사장이 배치됐기 때문에 속도보단 방향성에 무게를 두고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