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정현호]④ '만64세' 물밑 전영현 부회장의 시간
정현호 부회장의 용퇴로 박학규 사장이 삼성의 새로운 컨트롤타워 수장으로 떠올랐다. 이는 경영 안정 이후 변화라는 삼성의 전략적 기류를 드러내는 동시에 세대교체의 분명한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가장 미묘한 위치에 선 인물은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을 총괄하는 전영현 부회장이다.
'삼성 기술 리더십' 상징하는 전영현 부회장
삼성은 그간 △정현호(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 △전영현(삼성전자 DS부문장) △한종희(삼성전자 DX부문장) △최성안(삼성중공업 대표이사) 등 4인 부회장단 체제를 유지해왔다. 올해 3월 한 부회장이 갑작스레 별세한 데 이어 이달 7일 정 부회장까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부회장단은 사실상 2명만 남았다. 최 부회장이 비(非)전자 계열사를 맡고 있는 만큼 삼성 내 부회장급 리더십의 무게는 자연스럽게 전 부회장에게 쏠리고 있다.
전 부회장은 반도체 설계와 공정에 모두 정통한 기술 전문가다. 2000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합류해 2014년 사업부장을 맡았고 2017년에는 삼성SDI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겨 5년간 회사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삼성전자 DS부문장으로 선임되며 다시 반도체 전선에 복귀했다. LG반도체(현 SK하이닉스) 출신의 비서울대 경영진이지만 순혈주의가 강한 삼성전자에서 핵심 보직을 거치며 부회장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현재 삼성전자 경영진 체계는 이재용 회장을 정점으로 △박학규 사업지원실장(사장)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 △노태문 DX부문장 대행(사장) 등 '3인 체제'로 재편됐다. 이 회장이 전반의 방향을 총괄하고 박 사장이 전략·진단·인사 기능을 아우르는 컨트롤타워를 맡으며 전 부회장과 노 사장이 각각 반도체와 완제품 사업의 현장 경영을 맡는 구조다.
이번 보직변경으로 삼성 컨트롤타워 수장이 정 부회장에서 박학규 사장으로 교체되면서 직급 체계상 '사장-부회장' 간의 역학도 새롭게 형성됐다. 과거에는 부회장급 2명(정현호·전영현)이 수평적으로 협의하던 구조였지만 이제는 사장 직급의 컨트롤타워가 부회장 직급의 현장 총괄과 함께 조율하는 이례적인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 부회장은 기술리더십의 핵심이자 현장형 경영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는 삼성 내부 세대교체와 조직 재편이 맞물린 과도기적 단계로도 해석된다. 직급의 위계보다는 기능적 역할을 우선하는 체계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 부회장은 기술 리더십의 중심이자 현장 경영의 핵심 축으로, 박 사장은 재무와 전략을 아우르는 통제력의 축으로 각각 역할이 명확히 구분됐다.
세대교체 경계선에 서다
이번 사업지원실 인사에서는 세대교체 흐름이 뚜렷하다. 전 부회장은 1960년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 부회장과 동갑이다. 반면 신임 사업지원실장인 박 사장(1964년생)보다는 4살 위다.
단순한 연령 차이를 넘어 1960년대 초반생 경영진이 퇴진하고 중반생들이 그룹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전환점에 삼성이 서 있게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전 부회장은 기술 중심의 리더와 재무 중심의 리더 사이에서 권력 축의 이동을 완충하는 세대 간 연결고리 역할을 맡게 됐다.
이르면 이달 중순 단행될 삼성 사장단 인사는 이러한 세대교체 흐름을 구체화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전 부회장은 유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전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며 투자자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사과했다. 이를 고려하면 즉각적인 경영진 교체보다는 위기 국면을 안정적으로 수습할 여유를 주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 부회장이 고대역폭메모리(HBM)·파운드리 등 핵심 사업의 체질을 재정비하며 실적 회복 기반을 마련해온 만큼 기술 리더십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삼성의 현실적 선택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당장의 즉각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향후 1∼2년 내 전 부회장 역시 세대교체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실제로 정 부회장이 만 65세로 퇴임하면서 삼성의 '65세 룰'이 다시 작동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65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불문율을 의미한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당시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쇠퇴함을 이야기하며 "65세가 넘으면 젊은 경영자에게 넘겨야지 실무를 맡으면 안 된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22년 김기남 전 부회장(64세), 김현석·고동진 사장(61세) 등 주요 경영진도 비슷한 시기에 용퇴를 결정했다. 전 부회장은 현재 만 64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