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노트] '정현호 용퇴' 삼성의 현실과 미래 사이

2025-11-13     최지원 기자

 

삼성이 다시 재무통을 선택했다. 정현호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박학규 사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박 사장은 미래전략실,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CFO),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를 거친 정통 재무라인이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완전히 털어낸 뒤 새 판을 짜는 상황에서 시장은 기술에 밝은 엔지니어형 리더를 기대했다. 그러나 삼성의 선택은 예측가능한 안정이었다. 여기에는 현재의 삼성과 한국 산업이 처한 현실이 투영돼 있다.

삼성의 지난 10년은 위기대응의 시간이었다. 글로벌 반도체의 불확실성과 대외변수, 총수를 둘러싼 각종 사법 리스크 등에서 그룹을 지탱한 것은 관리와 통제의 리더십이다. 

그 한가운데에 정 부회장이 있었다. 그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내부 질서를 세우고 보고체계를 정비했다. 그의 리더십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삼성을 지켜온 방파제였다.

하지만 방파제는 물결을 막을 뿐 바람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안정이 길어질수록 현장은 느려지고 변화의 속도도 완만해졌다. 혁신의 자리는 효율성의 논리가 대신했다. 정 부회장 체제는 삼성의 질서를 정립한 시기였지만 이제는 넘어야 할 문턱이 됐다.

문턱 너머의 세상은 이미 완전히 달라졌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오픈AI의 샘 올트먼 같은 기술형 리더들이 산업 패러다임을 새로 쓰고 있다. 이들은 기술을 사업의 본질로 봤다. 황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인공지능(AI) 산업의 인프라로 확장했고, 머스크는 자동차를 배터리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체로 재해석했다.

이들의 리더십을 떠받치는 것은 기술이 곧 밸류에이션이 되는 시장이었다. 미국에서는 기술의 잠재력이 미래 현금흐름으로 즉각 환산되고 자본시장은 그 기대를 과감히 선반영한다. 실패는 낭비가 아니라 축적된 학습으로 기록된다. 이런 생태계가 기술형 리더십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산업구조는 다르다. 제조업 중심의 자본집약적 체제에서 환율·정책·공급망 등 외생변수가 수익성을 좌우한다. 기술 혁신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기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는 재무적 감각이 기업 경영과 주주가치의 핵심이 된다.

여기에다 실패에 냉정한 문화까지 더해진다. 시장은 단기실적에 민감하고, 여론은 실패를 과오로 본다. 미국식 하이리스크·하이리턴 모델은 현실적으로 정착되기 어렵다. 

결국 리스크관리형 리더십이 기업의 생존논리로 작동한다. 돈의 흐름을 정교하게 관리하고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능력이 경영자의 역량으로 꼽힌다. 삼성이 다시 재무통을 선택한 데는 이러한 계산이 깔려 있다. 

이 지점에서 박학규라는 인물이 부상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지만 일찍이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졌고 카이스트 경영과학과에서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연구했다. 삼성 내부에서는 재무를 다루되 기술의 언어를 이해하는 하이브리드형 리더로 통한다. 레인보우로보틱스 인수합병 당시 신속한 결정과 실행을 가능케 한 핵심 인물도 박 사장이다. 실제로 그는 과거부터 투자판단과 자본배분 과정에서 기술혁신의 방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박 사장을 내세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재무라는 큰 질서 위에 기술의 속도를 얹겠다는 것이다. 삼성식 현실주의와 미래주의의 절묘한 교차점이다.

맹자는 원칙을 지키는 '인(仁)'과 변화를 아는 '지(智)'를 함께 말했다. 삼성의 새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지금 그 말의 무게가 다시금 느껴진다. 

박 사장이 숫자만 관리하는 리스크관리형 리더에 머문다면 이번 인사는 또 한 번의 정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재무의 언어로 기술성장의 엔진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삼성은 관리의 시대를 넘어 창조의 삼성으로 나아갈 것이다. 박 사장에게 기대가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