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기술 인재' 내세운 이재용…삼성 'AI 드리븐 컴퍼니' 박차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예년보다 이른 시기 사장단 인사를 통해 '투톱 체제'를 복원하고 글로벌 석학과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기술 인재를 발탁해 전면에 내세웠다.
당초 재계 안팎에선 그룹의 2인자로 불렸던 정현호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용퇴한 이후 진행된 인사인 만큼 쇄신 메시지가 담긴 큰폭의 변화가 예상됐다. 하지만 최근 대내외 경영 불확실성 확대와 반도체 사업 회복 흐름 속에서 변화보단 경영 안정을 도모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는 기술 인재를 통해 본원적 경쟁력 강화와 '뉴 삼성' 기틀 마련에 힘을 실은 것으로 풀이된다.
'직무대행' 꼬리표 땐 노태문…2인 대표 체제 복원
21일 삼성전자는 이날 사장 승진 1명, 위촉업무 변경 3명 등 총 4명 규모의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인사 규모는 지난해 사장 승진 2명, 위촉업무 변경 7명 등과 비교해 큰 폭으로 줄었다. 당초 2인자였던 정 부회장이 용퇴하고 사업지원TF가 상설 조직인 실(室)로 격상되면서 이번 인사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조직 안정'에 방점이 찍혔다.
이번 인사에서는 고(故) 한종희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가전·스마트폰 등 세트 사업을 이끄는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 직무대행 겸 MX사업부장(사장)이 정식 DX부문장과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노 사장은 앞서 2018년 만 50세의 나이에 사장으로 승진하며 최연소 타이틀을 얻었다. 이번에 승진 7년 만에 임직원 약 12만명을 책임지는 삼성전자의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노 사장은 그간 스마트폰 사업을 이끌며 회사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실적 버팀목으로써 역할을 해냈다. 실제 노 사장은 취임 전인 2020년 99조5000억원 수준이었던 MX사업부(네트워크 포함)의 매출을 지난해 117조3000억원까지 성장시켰다.
그는 애플을 비롯해 중국 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힘들던 시기에 갤럭시S 시리즈를 포함해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스마트폰 개발에 참여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었다. 특히 갤럭시 AI 전략을 이끌며 온디바이스 AI폰과 폴더블폰을 흥행시켰다.
또 스마트 반지인 갤럭시 링, 확장현실(XR) 기기 갤럭시 XR, 트라이폴드폰 등 다양한 신규 폼팩터를 선보이며 시장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향후 모바일 사업에서 성공한 AI 전략을 영상·가전(VD·DA) 등 세트 사업 전반으로 확대하며 이 회장의 '뉴 삼성' 구상에 힘을 보탤 것으로 예상된다.
노 사장은 올해 꾸준히 AI를 강조해왔다. 그는 지난해 8월 DX부문 타운홀 미팅에서 "우리의 비즈니스 전략, 일하는 방식, 고객과 만나는 접점까지 다시 돌아보고 정립해야 할 시점"이라며 "AI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근본을 혁신하고 성장하는 'AI 드리븐 컴퍼니'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이번 인사에서 유임된 전영현 대표이사 부회장 겸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메모리사업부장은 SAIT원장직을 신규 사장으로 선임된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반도체 사업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를 갖췄다.
전 부회장은 지난해 5월 반도체 사업이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은 가운데 DS부문장으로 등판했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선 메모리사업부장까지 겸직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경쟁력 회복을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HBM3E 12단(5세대 제품)을 AMD에 이어 엔비디아까지 납품하며 33년 만에 내준 D램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차세대 제품인 HBM4도 납품이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만큼, 내년에 시장 점유율이 5%p 이상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적자로 어려움을 겪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시스템LSI(반도체 설계)사업부도 각각 테슬라와 애플의 대규모 수주를 따냈다.
삼성전자는 이번 인사에 대해 "스마트폰 사업을 담당하는 MX사업부를 비롯해 메모리 등 주요 사업의 지속적인 경쟁력을 강화했다"며 "시장 선도를 위해 양 부문장이 MX사업부장과 메모리사업부장을 겸직하는 체제를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기술 인재 전면에…AI 시대 미래 먹거리 사수
이번 인사에서 또 다른 키워드는 원천기술 강화다. 특히 각 분야 전문가를 DX부문과 DS부문의 연구 조직 수장으로 선임하면서 AI 등 미래 먹거리 기술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먼저 DS부문에선 하버드대에서 25년간 기초과학·공학 연구를 이끌어온 박홍근 교수가 신임 SAIT원장(사장)직에 올랐다. SAIT는 삼성전자 DS부문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10년 단위 핵심 기술을 설계하며 메모리·로직·패키징의 미래 연구 방향을 잡는다.
박 사장은 세계 최초로 단분자 트랜지스터를 구현하고, DNA나 생화학무기를 검출할 수 있는 단(單)분자센서와 탄소나노튜브 센서를 개발한 나노 분야 글로벌 석학이다. 특히 2003년 역대 최연소로 호암재단이 수여하는 삼성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하며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이 회장은 그간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고 강조했고, 지난해 3월 SAIT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선행 기술 확보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박 사장은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는 내년 1월부터 나노기술·화학·물리·전자 분야 연구를 기반으로 양자컴퓨팅·뉴로모픽 반도체 등 미래 디바이스 개발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DX부문의 R&D를 책임지는 최고기술책임자(CTO)에는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대표가 사장으로 승진하며 맡았다. 윤 사장은 1968년생으로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프트웨어(SW) 플랫폼 전문가다.
그는 2003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현 MX사업부) SW Lab 책임연구원으로 입사해 오랜 기간 MX사업부에서 SW 플랫폼·사물인터넷(IoT)·타이젠 개발 등을 주도했다. 삼성벤처투자에서는 AI·로봇·바이오·반도체 분야 투자를 이끌어 왔다. 2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오면서 DX부문 CTO로서 모바일, TV, 가전 등 주력 사업들과 AI, 로봇 등 미래 기술 간의 시너지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윤 사장의 승진으로 공석이된 삼성벤처투자 대표이사에는 이종혁 삼성디스플레이 대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 겸 IT사업팀장 부사장이 선임됐다. 이 신임 대표는 IT와 전자부품 분야 기술전문성 및 풍부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향후 삼성벤처투자를 글로벌 기업형 벤처캐피탈CVC)로 성장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당초 큰 인사의 변화가 예상됐지만 공급망 재편 등 대내외 경영 불확실성 확대 속에서 성과를 보인 양 부문장에게 한번 더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며 "12월 예정된 글로벌전략회의 전 새 리더십을 확정해 내년 사업 전략 마련에 집중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