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열하일기'를 꿈꾸며
'블로터(BLOTER)'라는 듣도보도 못한 말을 앞세워 뉴스공동체를 일궈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9월에 사이트를 열고, 11월에 정식 서비스를 개시한다고 발표했다. 사이트가 열린 지 4개월이 지났고, 정식 개시일로 치면 2달이 지난 셈이다. 그동안 블로터는 어떻게 자라왔을까. 아직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가 이르다. 허나, 해도 저물고 새로운 해가 떴으니, 기회라 여기고 이쯤에서 한번 돌아보자.
■ 웹2.0에 대해 수다를 떨다.
지난해 몰아친 '웹2.0'의 바람에 편승했다. 그래, '웹2.0 기반의 새로운 미디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잠시후 "허울만 2.0"이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방, 공유, 참여라는 웹2.0 사상에 턱없이 못미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따랐다. 변명이라도 해볼까.
"새로운 미디어로서 세상에 보여줄 게 너무도 많다. 그 가운데 이제 10분의 1도 보여주지 못했다. 현재의 모습으로 섣불리 평가하지 말아달라."
웹2.0은 변화 그 자체다. 자를 대고 쭈욱 선을 그어, '여기서부터 2.0이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라일리의 말을 들이대며, "최소한 이정도는 돼야 2.0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한다면, 다시 댓글을 달 수 밖에. "최소한의 기준도 변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러다 말 장난 되겠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그 변화를 어떻게 맞이하는 가 하는 마음가짐말이다. 블로터는 그런 변화에 과감히 몸을 던진 사람들이 모여있다. 지켜보면 알 일이다.
칭찬인지, 흉인지 알듯말듯한 말도 있었다. "사이트가 열리고 이리 저리 둘러보고 나서, 솔직히 좀 놀랐다. 기존의 미디어와 조금 이쁜 사이트 정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듯말듯 하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렇다, 칭찬이다. 그리고 칭찬받았다는 자랑이다.
<웹진화론>의 표현을 빌리면, '저쪽'의 평가와 '이쪽'의 평가가 보여주는 차이다. 그만큼 이쪽과 저쪽은 아직 간극이 크다. 그건 지난해 내내 피부로 다가왔다. '이쪽'의 뒤쳐짐을 고루하다 평가할 생각이 없으면, '저쪽'의 앞서감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쪽이 있으니 저쪽이 있고, 저쪽이 있으니 이쪽이 있는 것이니.
좀 더 솔직히 얘기하면, 저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 '블로터 열차'는 이쪽에서 연료를 얻고 있다.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블로터 열차의 뒤칸에 이쪽 세상을 달고 달린다는 것이다. 사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블로터는 끊임없이 '이쪽'과 '저쪽'에 대해 요란하게 수다를 떨며 달려왔다.
■ 우공이 산을 움직인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선을 긋고 싶어한다. 기를 쓰고 줄긋기를 시도한다.
"그러니까, 리포터야 블로거야?"
정체를 드러내라고 강요한다. 뉴스도 아니고 블로그도 아닌 그 무엇을 아직은 명쾌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니, 명쾌하게 설명했다 한 들, 그렇게 받아주질 않으니 할 말이 없다. 이쪽과 저쪽에서 모두 경계를 받아야 하는 처지, 그렇게 2006년의 절반을 보냈다.
"그러니까, 우린 블로터라니까."
잘 안다. 아무리 거룩한 말씀이라도 현실이 인정하지 않으면 '공자님 말씀'만 외다 끝나고 만다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결국 "바로 이런 거라니까"하고 눈앞에 보여줘야 한다. 새해 블로터가 이뤄내야 할 과제중의 과제다. 끊임없이 변해가야 하는 것, 한발 한발 조급해 하지말고 가야겠다. 웹2.0이 생기기까지, 웹1.0이 10년넘게 한결같이 변화하며 달려왔다. 우직한 사내, 우공처럼.
■ 함께 만드는 뉴스 공장
뉴스란 무엇인가. 새로운 소식일 터. 새로운 소식의 생산자이자 유통자는 그동안 성역처럼 자신의 둥지를 지켜왔다. 물론, 그 독점적 구조는 이미 깨졌다. 틈이 벌어지고 갈라져서, 이제 새로운 미디어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여전히 기존 미디어의 아성은 단단하지만, 블로터의 탄생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대체는 있을 수 없다. 역할분담이 이뤄질 뿐이다. 거대한 엑스트라들의 향연. 엑스트라들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엑스트라일 수 밖에 없다. 엑스트라를 위하여. 웹2.0이 외치는 소리다.
허나, 아직도 웹2.0이라는 새로운 무대의 역할분담에 못내켜한다면, 별 수 없다. 웹2.0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홀로 막아보려다 산산히 부서질 수 밖에.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뉴스는 이제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뉴스와 너희가 만드는 뉴스가 어우러져, 함께 만드는 뉴스가 박수를 받는다. 그런 역할분담에 충실한 미디어, 블로터 공장은 그저 그렇게 24시간 불을 밝힐 것이다.
■ 삶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
책상위에 차 한잔 올려놓았다면, 준비는 다 된 것이다. 모든 채비를 끝내고 차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다시 해를 갈아타고 책상위에 찻잔을 올려놓는다.
블로터 출범이 조금은 멀었을 때, 호젓하게 남도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다. 오락가락하는 봄비를 맞으며 백련사 뜰을 거니는 멋을 부리다, 산넘어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대나통을 연결해 멋스럽게 받아 내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초당 앞마당에는 찻물을 끓이는 커다란 돌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후학을 키우며 이렇게 차를 마셨다.
이곳이 유배지인가, 별장인가. 다산은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내게 가르쳐줬다.
다시 책상위의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모금. 어느새 찻잔이 반쯤 비었을 때, 아직 반이 남았다 할 것인가, 이제 반밖에 안남았다 할 것인가. 다산은 무어라 할 것인가.
■ 최초의 블로터 박지원을 생각하며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세번의 '반정'이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쿠데타'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과 함께 조선 역사 세번째 반정이자 마지막 반정이 '문체반정'이다.
문체반정은 하지만 쿠데타는 아니다. 거꾸로 조선의 위대한 임금으로 꼽히는 정조가 주도한 일종의 문화적 압박이었다. 정조는 당시 젊은 선비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던 '해괴하고 잡스러운 글쓰기'를 강제로 막고자 했고, 이것이 바로 문체반정이다. 쿠데타적 사건이 아님에도 '반정'이라는 말을 붙일만큼 국가적 중대사건이었던 셈이다.
정조는 수백년 이어져온 '거룩한 말씀을 인용해가며 글쓰기'에 반하는 '해괴하고 잡스러운 글쓰기'가 젊은 선비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는 것을 '국가적 재난'으로 규정하고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괴한 글쓰기의 진원지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했다.
한달간의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대표작이자, 중국 취재기다.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거룩한 말씀을 빌려가며 써내려가는 방식이 아니라, 중국 백성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를 밤새워 취재한 취재노트에 가깝다는 말이다. 공자의 사당이나, 중국 황실을 찾아 옛 성현들의 그림자를 짐짓 거룩하게 읊어대기 보다, 잠을 아껴가며 저잣거리를 배회하며 서민들의 삶을 살폈고, 재야의 선비들을 만나 현실정치를 논하길 좋아했다. 난생 처음 본 코끼리에 놀란 마음을 그대로 열하일기에 옮겼고, 허름한 주막집 벽에 흘껴 쓴 낙서에도 눈길을 놓지 않았다.
연암은 실생활에서 글쓰기 아이템을 찾았고, 또 그것을 이른바 '시쳇말'을 동원해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썼다. 그 당시에도 인터넷이 있었다면, 연암은 최고의 유명 블로거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연암이 정통 글쓰기에 약한 선비는 아니었다. 이미 당대 최고급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정조가 무엇보다 연암을 주목한 이유는 바로 대문장가인 사람이 궤도를 이탈해 '해괴한 글쓰기'에 몰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글쓰는 방식에서 '거드름'을 제거한 것 말고도, 연암은 중국 취재를 통해 궁핍한 조선 백성들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이용후생'의 실학파의 탄생이었다. 조선의 과학자 홍대용, 정철조. 서얼출신의 지식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무예도보통지>의 출판 책임자 무인 백동수 등이 연암 패밀리를 형성해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을 일궈낸다.
블로터는 '디지털 시대의 열하일기'를 꿈꾸는 자들이 아닐까. 그것이 <열하일기> 얘기를 새해벽두부터 꺼내든 까닭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