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TV를 없애다

2007-01-02     도안구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들 들떠 있을 새해지만 저희집은 묘한 변화로 인해 상반된 분위기입니다. 거실에 자리잡고 있던 TV를 베란다로 옮겨버렸습니다. 말이 옮긴거지 아예 TV 시청 자체를 못하게 베란다에 방치시켰습니다. TV를 베란다에 방치하자 엉엉 우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올해 3월에 초등학생이 되는 큰 아이입니다. 물론 글을 쓰는 저도 익숙지 않은 환경에 어찌할 지 몰라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소파에 두 다리를 주욱 펴고 누워 리모콘을 이리저리 눌러대던 즐거움이 사라졌으니까요. 단순한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 변화가 생긴 것이죠. 



이런 시도를 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결혼 초기 방 두칸짜리 전세집에서 신혼 생활을 할 때도 안방에 있던 TV를 작은 방에 놓으면 아내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을거라고 해서 옮겼었는데요. 막상 전 작은 방에 가서 옆으로 또 누워서 리모콘을 누르고 있었고, 이 모습을 본 아내가 혀를 찼었습니다.


그 후 두번째 시도하는 일인데 그 때와 달라진 점은 시청자가 늘었다는 겁니다. 결혼 생활하면서 큰 아이와 둘째 아이를 얻었고, 이 친구들이 저와 리모콘 쟁탈전을 벌이는 경쟁자로 급부상했습니다. 아내도 TV를 좋아하긴 하지만 맞벌이 생활 후 TV 시청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TV를 보는 제가 이런 노력을 막는 걸림돌이죠. 아이들이 저와 함께 TV를 보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 참에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TV를 옮겼습니다.


큰 아이는 월화 드라마 <주몽>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이마트에 가서 주몽의 칼, 화살, 머리띠, 방패 세트를 사서 동생과 함께 '이야~~'하면서 아파트를 뛰어다니곤 합니다. 아랫층에 거주하는 분들에게 죄송스러울 정도입니다. 큰 아이는 주몽의 주제가를 흥얼거리고 등장 인물들을 꿰고 있습니다. 주몽은 어린이집 아이들 사이에도 엄청난 인기입니다. 관련 책들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저도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는데 아이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라던가 고구려의 왕들에 대해서 알게됐습니다. 


큰 아이가 즐겨보는 TV 프로 중에는 EBS의 로봇파워, 한자퀴즈왕도 있습니다. 나중에 로봇을 만들겠다고 하기도 하고, 마법천자문 책을 사서 읽고 장풍으로 바람 풍을 저에게 날리곤 합니다. 마법전사유켄도는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입니다. 장난감으로 마법전사유켄도에 나오는 칼을 사줬습니다. 그것이 큰 아이가 생일 선물로 가장 갖고 싶어했던 물건이었거든요.


맞벌이를 하고 있어서 아이들은 외할머니가 어린이집에 보내고 데려오십니다. 5시부터 아내와 제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TV를 시청합니다. 장모님은 드라마를 좋아하시지만 케이블TV를 시청하시지 않습니다. 있던 케이블TV도 끊으셔서 공중파 정도만 시청하십니다. 마법전사유켄도는 저희집에 와서 봐야 했는데 이런 기회가 박탈된 것이죠. 주말에 보던 DVD나 비디오도 이제 안녕입니다.


지난해부터 아이의 엄마이자 제 아내가 TV를 없애자고 주장해왔습니다. TV가 주는 유익함도 있지만 TV는 가족간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서로의 소통을 없애는 주범이라는 것이죠. 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생각해서 집에서 책 읽는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선 TV를 없애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아이들보다는 주말이나 심야에 TV를 끼고 있는 제 모습도 보기 싫었고, 아이들도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닮아가니까 문제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한달 정도 테스트 삼아 일단 없애보기로 했습니다.


당장 큰 아이가 주몽을 시청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큰 아이는 "아빠가 어쩌면 저럴수 있어? 아빠 맘대로 그렇게 하는 게 어딨어? 주몽을 못보게 하면 어떻게 해.. 정말 너무해"라고 항의합니다. 엄마가 없애자고 했고, 그래서 없앴는데 욕은 아빠가 먹습니다. 억울합니다.


이곳 저곳에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말은 "애들 왕따 시키려구 작정을 했구만..쯧쯧"입니다. 아이들끼리 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걸 시청하지 못하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낄수가 없다는 것이죠. 큰 아이는 벌써부터 주몽을 하는 월요일과 화요일은 외할머니 집에서 안오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적이 이전에도 몇번 있었습니다. TV가 집에 있었을 때도 주몽을 안보여주고 일찍 자라고 하면 잠자리에 들어서면서 오늘 소서노가 주몽을 도와주는 날인데 어떻게 하냐고 엉엉 울곤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와서 보라고 하면 함박 웃음을 짓고 몰입하곤 했죠.


또 다른 분들은 "케이블선만 없애면 되지 뭐하러 굳이 TV를 거실에서 퇴출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냐"고 하십니다. DVD나 비디오 등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데 아예 원천 봉쇄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전에 아이의 영어 교육 때문에 잠깐 상담하러 갔을 때 "TV를 없애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멀티미디어 교재가 얼마나 좋은데 아예 못보게 하고 활용을 안하려고 하느냐? 어떤 것을 하더라도 한쪽 말만 듣고 하면 안된다. 그걸 부모가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가 실은 고민거리입니다. 


실은 TV를 옮기고 DVD 플레이어를 옮기면서 이 생각을 안해본 것이 아닙니다. 근데 그렇게 하면 아이들 재우고 똑같이 제가 케이블을 연결해서 예전 모습으로 갈 것이 뻔해서 아예 옮겼습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큰 아이를 보면서 제 어릴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 고향은 아직도 시골 '깡촌'입니다. 동네에 흑백 TV가 들어오던 때 그 집에 모두 몰려가서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TV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나들은 매일 우리를 부르러 오면서 '내일 또 오게 하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곤 했습니다. 저희 친구들 대부분이 그랬고, TV가 있는 집은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우리집에도 흑백 TV가 생겼고,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도 우리집에 많이 몰려왔죠. TV가 보급되면서 같이 보던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고, 제가 중학생이 되면서 이제는 정말 가족끼리 보게 됐습니다. TV에서 재밌는 프로그램을 하는데 부모님이 "고추 따러 가자거나 일하러 가자"고 하면 정말 하늘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미운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비오는 날, 특히나 비오는 주말을 좋아했습니다. 일은 안하고 하루종일 TV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시골은 케이블도 없어서 전 중학생이 되고서야 케이블을 통해 24시간 TV 시청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가 아마 1983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읍내에 나갔더니 하루 종일 TV가 나오더군요. 시골은 케이블이 없어서 아침방송하고 6시인가 그 때부터 저녁방송이 나왔었거든요. ^.^)


저와 아이들에겐 엄청난 변화입니다. 한달 동안의 새로운 시도 후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