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궁금해진다. 오라클은 썬과의 조합으로 정말 HP와 IBM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썬의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이번 행사 한번으로 이를 만회할 수 있다고 보는 걸까? 유럽연합이 오라클과 썬의 인수합병에 대해 아직까지 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오라클과 썬을 발목잡고 있지만 둘이 합병됐을 때 과연 HP와 IBM을 넘어 설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일단 오라클의 행보를 한번 살펴보자.

오라클은 지난해 HP와 제휴해 첫 DW 어플라이언스였던 'HP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머신(엑사데이터)'를 발표했다. HP와 3년간 연구개발한 결과였다. 당시 HP의 하드웨어는 유닉스 머신이 아니었다. HP 프로라이언트 DL360와 DL180 G5라는 x86 서버였다. DL360 위에 오라클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11g, 오라클 RAC(Real Application Clusters)가 구동됐고, DL180 G5 위에 DW 전용 장비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개발된 새로운 소프트웨어인 엑사데이터 스토리지 서버가 구동됐다.

최근 오라클이 썬과 손을 잡고 출시한 엑사 데이터 2.0 제품 또한 x86 서버 기반이다. 인텔 제온(Nehalem) 프로세서를 사용했다. 당연히 운영체제 또한 자사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였다. 썬의 유닉스 머신을 활용해 만들어 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미 엑사데이터에 내장됐던 리눅스 운영체제와 엑사데이터 스토리지 서버가 x86에 최적화됐고, 운영체제를 유닉스로 교체할 경우 엑사데이터 스토리지 서버를 이에 맞게 최적화시켜야 하는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래리 엘리슨이 이번 장비를 출시하면서 했던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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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오라클 오픈월드 2009 샌프란시스코 첫날 행사에서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 스캇 맥닐리 회장과 오라클 CEO인 래리 엘리슨이 악수를 하고 있다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오라클 CEO은 “엑사데이터 버전 1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DW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제품이었다. 엑사데이터 버전 2는 DW 관련해 버전 1보다 2배 정도 빠르며 OLTP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데이터베이스 머신이다. 엑사데이터 버전 2는 사실상 모든 데이터베이스 애플리케이션을 세계의 어떠한 컴퓨터보다도 더 빠르고 저렴하게 실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 엑사데이터 버전 2에 탑재된 인텔 제온 프로세서 5500 시리즈(코드명 네할렘 EP)는 올해 초 인텔이 야심작으로 내놓은 제품이다. 당연히 새로운 성능의 CPU를 탑재했으니 성능이 높아졌고, 썬이 가지고 있던 플래시 가속기 기술을 적용했으니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년에 이 장비는 또 한번 업드레이드 될 수 있다.

인텔과 AMD 때문이다. 인텔은 올해 2소켓의 네할렘 EP를 출시하면서 썬의 T5240 제품과 IBM의 P578 제품이 주 타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유닉스 CPU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선언했다. 그랬던 인텔은 내년 초 네할렘 EX라는 4소켓 CPU를 선보인다. 유닉스 타깃 기종이 한단계 더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그동안 출시하겠다고 약속했던 HP와 공동 개발하고 있는 아이테니엄2 CPU도 상반기 내놓겠다고 밝혔다. 미드레인지 유닉스 시장과 하이엔트 유닉스 시장을 모두 공략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AMD도 2009년 6월에 6코어인 이스탄불을 발표했고, 2010년 1분기 12코어(코드명 매그니 쿠어스:Magny Cours), 2011년 16코어(코드명 인터고라스 Intergoras) 출시를 예고하고 있다.

인텔과 AMD가 치열하게 경쟁하면 할수록 유닉스 시장은 조금씩, x86 서버 시장으로 넘어오게 돼 있다. 오라클로서도 x86 서버 시장이 크는 것이 전혀 손해가 아니다. 오라클은 윈도우 서버 기반 DBMS 시장에서 전세계 40%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리눅스 서버 기반 DBMS 시장에서는 80%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SQL 서버와의 경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동안 오라클은 x86 시장 키우기에 적극적으로 지원한 업체였다. 오라클은 x86 서버 시장이 급성장하자 리눅스 운영체제 시장에 뛰어들면서 고객들의 비용 절감을 외치고 있었다. 물론 유닉스 업체들간 협력도 단행하고 있지만 유닉스 운영체제와 하드웨어가 결합된 형태로 고객에게 전달되는 제품 때문에 기업들의 IT 투자 비용이 높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지난 2006년 10월 25일(미국 현지시간) 오라클 래리 엘리슨 최고경영자(CEO)는 오라클 오픈 월드 컨퍼런스에서 레드햇(redhat)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레드햇 리눅스지원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레드햇의 기술지원보다 50% 정도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SK텔레콤 모바일 네이트 인프라의 경우 유닉스 환경에서 x86서버 기반으로 교체됐고, 운영체제는 오라클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가 제공됐다. 사례가 등장하면서 한국오라클도 이 분야에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문제는 유닉스 시장이다. 아직까지 기업 고객들이 x86 서버를 불신하고 있다고 하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는 유닉스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CPU 투자가 불가피하다. 유닉스 운영체제가 가동되는 CPU를 만들고 있는 곳은 이제 썬과 IBM밖에 없다. 썬은 인텔과 AMD 진영에 협공을 받고 있고, 하이엔드 유닉스와 서버 시장에서는 HP와 IBM에 밀려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썬은 10억 달러 이상을 들여 차세대 서버 프로세서인 스팍 RK(코드명 ROCK)을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라클에 인수된 후 이 개발이 중단됐다.

그렇다면 오라클은 스팍칩만을 가지고 IBM과 HP의 하이엔드 유닉스 제품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스팍 칩의 경우 후지쯔와 공동 개발하고 있어 비용 부담의 무게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차세대 CPU를 포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건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궁금증에 대한 오라클의 대답을 엿볼 수 있는 보도자료가 공개됐다. 오라클은 오픈월드 2009 행사 첫날 보도자료로 자사의 DBMS가 썬의 스팍칩이 들어간 썬의 솔라리스 장비에서 최고의 성능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오라클은 TPC-C 벤치마크에서 솔라리스 운영체제(OS)가 탑재된 칩 멀티스레딩(CMT) 썬 스팍 서버 기반에서 자사의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11g (Oracle Database 11g)가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썬의 장비는 T5440이다. 이번 벤치마크 결과를 통해 오라클은 오라클과 썬의 결합이 IBM 파워 595 에서 운영한 IBM DB2보다 빠르다는 것을 입증했고, 오라클과 썬의 구성은 IBM과 비교해 26% 빠르게 실행되면서도 4배 적은 에너지를 소모할 뿐만 아니라 거래 반응 시간이 16배 빠르다고 주장했다.

100억원이라는 상금도 걸었다. IBM 파워 6 칩이 내장된 파워 595 모델에 비해 자사의 성능이 떨어지면 이걸 내겠다는 것이다. 도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밝힌대로 썬의 장비가 T5440이라는 것.

이 장비는 미드레인지 유닉스 장비로 썬은 이 제품보다 더 나은 성능을 내고 있는 M9천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비교 대상이었던 IBM의 파워 595 모델은 IBM의 최상위 유닉스 기종이다. 국내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 중 메인프레임을 다운사이징 했던 고객사 몇곳이 이 장비를 도입했다.

이 때문에 오라클의 행보는 언뜻 보기에 경쟁이 안되는 무기를 들고 거함 IBM이라는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아 보인다.  그것도 엄청난 돈을 내고 말이다.

이와 관련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썬의 CMT라는 특화된 기술을 최대한 활용한 것 같다. 또 최근엔 클러스터 기술이 많이 발전해 여러 대의 서버를 클러스터링 해서 쓸 경우 엄청난 컴퓨팅 파워를 낼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클라우드 컴퓨팅도 IT 자원을 가상화하고 이를 클러스터링 소프트웨어로 엮는 구조 아닌가? 기상청에서 도입한 슈퍼컴퓨터 또한 마찬가지 기술이 적용됐다"면서 "기업들은 서버도 중요하지만 정작 이 서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얹었을 때 얼마나 안정적이고 유연하면서 확장이 가능하고 성능이 뛰어난지를 살핀다. 그런 면에서 썬의 제품이 미드레인지 제품이긴 하지만 IBM의 최상위 유닉스 기종과 경쟁할 수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런 고객들의 요구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기존 기술들을 잘 버무려 오히려 최상위 기종을 넘어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미드레인지 서버를 구매하면서도 성능과 확장성, 안정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최상의 기업들의 요구에 대응한 것으로 비용도 최상위 유닉스 서버를 구매했을 때보다 저렴하다는 이점까지 챙겼다는 설명이다.

인텔과 AMD, 썬과 후지쯔, 오라클 연합과 IBM의 외로운 시장 지키기 싸움이 남았다는 뜻이다. IBM 입장에서는 파워칩에 대한 투자 몫을 혼자 고스란히 감담해야 되는 상황이다. 흔들리는 AMD를 인수하면서 인텔에 반격을 날리면서 이들 조합을 깨던가 아니면 조금씩 시장을 이들 연합군에 내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오라클은 이런 IBM의 상황을 보고 정면으로 싸움을 건 것으로 보인다.

오라클은 오라클 10g라는 DBMS 제품을 출시하면서 그리드 기술을 강조했고, 리얼애플리케이션클러스터(RAC)라는 독보적인 공유DB클러스터링 소프트웨어도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그리드와 클러스터링 기능들을 미들웨어 분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DB와 미들웨어를 강력하게 연동해 고객들의 속도 저하 문제와 시스템 안정성을 염려를 해결해주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썬의 하드웨어 시장 점유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고 스토리지 시장 점유율도 마찬가지다. 시장조사 업체인 IDC가 발표한 09년 2분기 서계 서버 시장 매출 자료에 따르면 IBM(35.5%), HP(28.5%), 델(12.4%), 썬(10.0%), 후지쯔/후지쯔지멘스(3.5%), 기타(11.0%)를 차지하고 있다. 전년분기 대비 썬의 09년 2분기 매출 성장률은 -37.2%로 경쟁 서버 업체 중에 최악이었다.

오라클과 썬의 조합이 IBM을 겨냥하고 있지만 일단 HP를 먼저 넘어서야 한다. 오라클이 썬을 인수하면서 가장 먼저 불똥이 튈 업체는 누가봐도 HP다. HP가 찬밥 신세가 됐다는 것은 이번 오라클 오픈월드 행사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오라클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연설자로 나선 앤 리버모어 HP 부사장은 "HP가 가진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시스템, 프로페셔널 서비스 등은 현재 IT 측면에서 고객들이 당면한 이슈들을 해결해드리는데 최상의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라클의 프로페셔널 서비스와 HP의 역량이 결합하게 되면 더욱 완벽한 서비스 제공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라고 청중에게 말했다.

하지만 부사장의 키노츠 시간인 45분이 채 끊나기도 전에 참여했던 많은 청중들이 자리를 떴다고 한다. 소프트웨어 없는 하드웨어 업체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3년 전 오라클의 요구를 받아 개발했던 '엑사데이터 1' 제품은 1년도 안돼 엑사데이터 2에 자리를 내주게 됐다.

물론 당시 개발했던 하드웨어 스펙에 대한 노하우를 확보하고는 있지만 오라클이 썬 서버에 힘을 실어주게 되면 HP로서는 경쟁력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HP가 국내는 물론 해외 하이엔드 유닉스 시장에서 IBM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배경도 오라클이 IBM의 DB2 시장 점유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HP와 긴밀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HP가 얼마나 오라클과 썬의 조합의 파괴력을 최소화하고 시장 확산을 지연시키느냐에 따라 오라클과의 관계도 다시금 재정립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라클이 썬을 인수했을 때부터 하드웨어 부문 매각설이 나돌고 있었고, 그 대상으로 HP가 거론됐던 것도 둘의 궁합이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오라클은 하드웨어 시장에 더 많은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밝혔지만 HP가 오라클과의 협력을 끊고 마이크로소프트에 올인을 하는 순간 오라클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입장에서도 인텔과 AMD의 CPU 성능 개선과 자체 서버 OS의 지속적인 개선 등으로 유닉스 고객을 넘어설 준비가 됐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일차 타깃이 된 IBM 입장에서는 우선 HP를 넘어서고 오라는 느긋한 입장이겠지만 언제까지 여유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버 시장에서 여전히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메인프레임이라는 독보적 혹은 독점적 장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 뿐 유닉스 서버와 x86 서버 시장에선 경쟁사들에 치이기 일수기 때문이다.

그간 하드웨어 업체들이 사업 다각화를 위해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당연한 흐름으로 취급돼 왔다. IBM과 HP, 시스코도 이런 길을 걸어가고 있다. 반면 소프트웨어 기업이 하드웨어 사업에 뛰어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라클이 닮고 싶어했던 모델인 애플이나 시스코의 경우는 최고의 하드웨어 제품에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긴밀히 통합해 제공했던 업체지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다가 하드웨어 사업을 한 업체는 아니다.

오라클의 행보는 그런 면에서도 IT 역사에 기록될 흥미로운 뉴스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썬의 매출 하락을 래리 엘리슨 오라클 CEO가 무슨 묘수로 반전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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