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벤처기업이 있습니다. 괜찮은 인력도,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실행력도 갖췄습니다. 문제는 자금입니다. 주머니만 채우면 제대로 도전해볼 태세입니다.

지금까진 어땠나요. 개인 자금을 이곳저곳에서 끌어대거나, 벤처투자기업(VC) 문을 두드리는 게 흔한 수순이었습니다. 헌데 만만찮습니다. 알음알음으로 종잣돈을 모으는 건 품만 많이 들 뿐, 금세 바닥을 드러내곤 합니다. 든든한 매출 실적도, 구체화된 제품도 없는 벤처에겐 은행 문턱은 높기만 합니다. VC라고 별반 다를까요. '모험에 뛰어든 기업'에 선뜻 지갑을 여는 풍경은 희미한 옛 추억일 뿐입니다. 모험보다는 안정 지향형 투자로 돌아선 건 공공연한 비밀 축에도 들지 못하는 시대니까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품앗이 투자' 말입니다.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지갑이 메마른 벤처에 개인 여럿이 십시일반 자금을 대주는 일입니다. 그럴듯하게 말하면 '크라우드 펀딩'쯤 되겠군요.

이런 서비스를 시작한 곳이 있습니다. 팝펀딩입니다. 팝펀딩은 '오픈 머니 마켓'을 내건 서비스입니다. 개인끼리 적은 돈을 빌려주고, 이율까지 경매 방식으로 대출자가 선택하는 금융거래 e장터입니다.

지금까진 급전이 필요하지만 제도권 금융 문턱을 넘기 어려운 금융거래 소외층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해왔는데요. 이번에 중개 대상을 벤처기업까지 확대한 모양새입니다. 자금이 필요한 벤처기업과 개인 소액 투자자들을 중개해주는 '소셜 펀드레이징'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간 소액 투자를 중개해주는 e장터가 된 셈입니다.

첫 수혜 벤처기업도 탄생할 모양입니다. '흥업미디어'가 주인공입니다.

흥업미디어는 영화저널리스트 최광희와 방송국 PD 출신 김경찬,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등이 모여 만든 영상 콘텐츠 제작 기업입니다. 팀블로그 '3M흥업'으로 출발해 기업으로 확장한 모양새입니다. 흥업미디어는 지난 1년동안 첫 프로젝트로 애니시트콤 '찌질스'(zzizzls)를 준비해왔습니다. 전체 30부작 가운데 '파트1'인 10부작을 우선 제작중인데요. 지금까지 7부가 완성된 상태입니다.

zzizzls_logo
▲ zzizzls_logo

프로젝트를 잇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흥업미디어는 팝펀딩에 눈을 돌렸습니다. 팝펀딩 개미 투자자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파트1' 10부작 제작에 필요한 1천만원을 품앗이 투자로 모으는 시도를 하게 된 겁니다.

투자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 투자자 위험을 줄이는 장치가 돋보입니다. 전체 모금액은 1천만원이지만, 개인이 선뜻 큰 돈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팝펀딩은 개인 1명이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을 2만원으로 못박았습니다. 500명이 품앗이로 1천만원을 투자하도록 한 셈입니다. 욕심껏 투자하고픈 사람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도약 기로에 선 벤처기업에 기회를 열어주는 데 초점을 맞춘 모양새입니다.

투자자 500명은 투자금의 5%에 이르는 이자를 매달 원금과 더불어 돌려받게 됩니다. 매달 애니시트콤 제작 진행 보고서도 받아보고, 정기 프로모션 시사회에 참석해 제작 과정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수익도 얻고, 문화 콘텐츠에 힘을 보태는 보람도 느끼도록 한 겁니다.

또 있습니다. 1천만원을 투자받은 흥업미디어가 손익분기점을 넘어 수익을 내게 되면 어떨까요. 이 수익금은 분기마다 결산해 학자금 기금으로 다시 내놓게 됩니다. 팝펀딩에서 진행하는 무이자 학자금 대출 기금으로 쓰이는 겁니다. 십시일반 펀딩에서 출발해 낸 수익금이, 돈이 없어 학업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돌고 도는 모습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의 선순환이랄까요. 만약 투자자 가운데 학자금 대출이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우선 순위로 팝펀딩에서 대출을 받을 기회도 제공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제도입니다. 벤처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모을 뿐 아니라 다수 투자자에게 사업 자문도 덤으로 받습니다. 광고비로 큰 돈을 내지 않아도 여럿에게 사업 내용을 알리는 입소문 마케팅 효과도 노릴 수 있겠죠. 투자자도 큰 위험 없이 뜻 맞는 기업에 힘을 보태고, '싹수 있는' 벤처를 돕는 보람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흥업미디어 애니시트콤 '찌질스'는 1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을 겨냥해 내놓은 애니메이션입니다. '찌질한' 백수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묘사하면서도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외모지상주의, 형식과 겉치레를 중시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를 녹여낸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품 이름은 '찌질'할 지 몰라도, 프로젝트를 잇는 방식이 멋스럽습니다. 기운찬 도약을 준비중인 흥업미디어와 여기에 힘을 보태는 팝펀딩, 이름모를 500명의 투자자 모두를 응원합니다.

<덧> 흥업미디어 품앗이 투자는 3월23일까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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