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구글이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이후로 여기저기서 모바일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난리다. 전통적인 하드웨어 업체로 구분됐던 삼성전자도 바다OS를 들고 나왔으며, 박스를 만드는 데에 만족했던 HP도 팜(Palm)을 인수하며 이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통사들도 과거의 시장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독자적인 플랫폼을 안착시키려고 혈안이 됐다. 위피 의무화 조항이 삭제된 이후 SK텔레콤과 KT가 각각 SKAF, KAF라는 프레임워크를 출시하더니, 이 위에 자체적인 애플리케이션 마켓을 얹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내 이통3사의 통 합 앱스토어와 전세계 이통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WAC(Wholesale App community)도 추진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운영체제와 애플리케이션 마켓을 넘어 서비스 플랫폼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통사, 제조사부터 포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통합 SNS와 음악 서비스, 클라우드 기반의 개인화 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 플랫폼을 내놓고 있다.

게다가 n-스크린의 흐름을 타고 플랫폼 경쟁이 TV와 넷북, 태블릿까지 다양한 디바이스로 확대되고 있으니, 어떤 플랫폼이 살아남아 시장을 주도하게 될 지를 예측해보려면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다.

한참 머릿속이 복잡할 때 이상돈 오범 코리아 책임 애널리스트(사진)를 만났다. 그는 실리콘밸리와 국내 통신업계를 거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다. 다짜고짜 그에게 어떤 조건을 갖춘 플레이어가 모바일 플랫폼 시장을 주도하게 될 지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모바일 플랫폼은 이종 격투기 전쟁입니다. 애플이 아이폰과 앱스토어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이후 모바일 플랫폼 시장은 이종 격투기 시장으로 갔어요. '어떤 종목의 선수가 유리하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태권도 선수든, 유도 선수든, 아니면 무에타이를 하던 선수든 정해진 룰에 맞춰 잘 싸우는 선수가 이기는 거죠"

참으로 적절한 비유다. 이상돈 애널은 "결국 플랫폼을 잘 만들고 같은 팀(서드파티와 협력업체-콘텐츠 사업자, 서비스 사업자, 솔루션 사업자 등)을 잘 꾸리는 진영이 승리할 것"이라며, 특히 이종 격투기에서는 '체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체력에는 다양한 요소가 포함됩니다. 자본과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기업 문화나 협력업체와의 관계 등 잘 보이지 않는 부분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플랫폼이라 하면 에코시스템 내에서 서드파티, 협력업체들과 장기적인 계획과 투명한 수익구조를 기반으로 한 상생 모델이 구축돼야 하기 때문이죠. 국내 대기업들이 플랫폼을 구축하는데 애를 먹고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들어 대기업들이 '협력, 협력'하면서 강조하고 있지만, 정말 국내 대기업들이 국내외 중소기업이나 서드파티들과 '윈-윈'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국내 제조업체와 일을 해본 해외 이통사와 콘텐트 업체들도 국내 대기업들이 '윈-윈'하는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선보인 바다 플랫폼의 미래에 대해서도 장미빛으로 보지 않았다. "바다는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리모에 미들웨어를 얹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며, "국내 시장만을 생각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이와 같은 형태로 플랫폼 기반의 에코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바다가 플랫폼으로서 안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단말기 제조사나 컨텐트 업체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데, 과연 어느 제조업체가 바다를 가져다 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삼성전자보다 훨씬 많은 물동량을 자랑하는 노키아의 심비안도 애플과 구글이 등장한 이후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체력도, 변변한 팀(서드파티)도 없는 이종 격투기 선수가 현란한 발차기 기술만 믿고 덤비다가는 1라운드가 끝나기도 전에 체력이 소진되고 말 겁니다. 노키아가 심비안을 오픈소스로 전환하며 부랴부랴 플랫폼 업체라는 제스처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돈 애널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플랫폼 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보는 것일까? 그는 "대기업의 기형적인 지배구조가 개선되기 전까지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가장 원론적이면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을 찌른 셈이다.

국내 대기업이 역량있는 중소기업들과의 상생의 전략을 구사하는데 인색한 것도, 사용자에 대한 끊임없는 스펙트럼 분석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플랫폼 투자를 하지 못하는 것도, 단기적 마케팅 효과에 의존한 사업실적에 집착하는 것도, 여러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보면 순환 출자 방식의 재벌 지배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지배구조에서는 조직 논리로 인해서 중장기적인 기술 개발이나 투자 전략을 세우기가 힘듭니다. 중간 관리자급이 전부 단기 실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특히나 장기적인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플랫폼 전략은 당장 들어가는 돈은 엄청나지만 그 수익은 한참 후에나 나오기 때문에, 한 번 해보고 안된다 싶으면 바로 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플랫폼 구축 경험도 점점 부족해 지는 것이죠."

이상돈 애널은 대기업들이 중장기적인 기술 로드맵이 부족하다 보니, 역량있는 엔지니어들을 많이 보유하고도 플랫폼을 설계할 수 있는 뛰어난 소프트웨어 아키텍터를 양성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현했다. 엔지니어들에게 폭넓은 커리어를 제공하고, 스톡옵션 방식으로 동기부여를 하는 데에 인색한 점도 사실상 지배 구조와 연관돼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해외에서 근무했던 경험담을 들려주며, 실리콘밸리의 역량 있는 회사들은 국내와 같은 보너스 제도보다는 스톡옵션 제도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연말에 인센티브 잔치를 벌이며 보너스 3천만 원을 주는 것과 3만원 짜리 스톡옵션 1천 주를 주는 것은 액수는 같아도 직원들에게 미치는 장기적인 효과가 천지차이라는 설명이다. 엔지니어들이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회사의 경영실적에 따라 주식가치가 오르고 액면분할을 해나가면서 엔지니어와 회사가 함께 성장해나가는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엔지니어 가운데 백만 장자가 아닌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국내 대기업은 어떤가요. 이사진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냥 월급쟁이에 불과합니다. 일을 잘하면 보너스 주면서 더 시키려고만 하고, 같은 분야의 업무만 계속 맡기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쌓기도 어렵습니다. 엔지니어들에게 제대로 된 커리어를 제공하고 아키텍터 수준으로 성장시켜야 하는데 그런 마인드가 없어요."

이상돈 애널은 이러한 현실에서 국내 기업이 플랫폼을 정말 잘 만들 여력이 없다면, 빨리 해외 업체의 플랫폼이라도 가져와서 사업 기회를 만들어내면서 천천히 기초체력을 키워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애국심에 호소해 불완전한 플랫폼으로 국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봤다. 국내 시장을 갈라파고스로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에서 아무리 잘나가는 플랫폼이라도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외산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할 경우 기술 종속 문제가 우려되기도 한다. 그는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그 플랫폼을 잘 이용해서,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솔루션을 내놓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먼저 찾아와서 "우리 플랫폼에도 공급해주십시오" 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현재 모바일 시장은 플랫폼에 욕심을 내는 대기업보다는 오히려 탄탄한 중소기업에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중소기업도 글로벌 플랫폼을 활용하면 단숨에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입니다. 보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험을 쌓고, 이런 경험이 밑거름 돼서 국내에서도 글로벌 플랫폼을 꿈꿀 수 있는 기업 문화와 철학을 가진 기업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는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고 했지만, 약속된 일정이 있어서 아쉽게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다음 만남에서는 국내 기업이 통신 시장에서 플랫폼 기반의 에코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어떤 역량을 더 향상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가지고 얘기하자고 했다.

국내 모바일 산업을 위해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던 이상돈 애널과의 다음 인터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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