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당시 MIT 미디어랩 소장이었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자신의 역저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를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으로 내면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로 전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자책은 종이책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를 해독하는 인식 작용을 넘어서서 그 책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감성을 체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파워블로거 중 하나이자 마케팅 구루인 세쓰 고딘도 그의 블로그에서 그가 블로그 뿐 아니라 책을 발간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사람들에게 내 지식의 영향력을 파급시키는 데에는 블로그가 더 유효한 수단이지만, 책은 그 사람이 집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에 보다 직접적인, 더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블로그 뿐 아니라 책도 남아야 한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죽일 것인가. 위의  두 기술과 경영 구루의 현답을 통해 생각해볼 때, 전자책은 종이책이 가진 아날로그 감수성과 직접적 영향력의 강점을 흡수할 수 있을 때 후자를 진정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되면서 아날로그로 남아 있던 것들을 대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고출판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으로 전자책이 논의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책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다. 책을 사고 파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고 느끼는' 이용자 경험(end-user experienece)의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말한다. 이제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들고 나온 것이 킨들이다. 전자잉크(e-ink)라는 신기술을 사용한 이 독서용 휴대용 디지털 기기는 태양광에서도 불편없이 독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무선랜 기능을 지원해서 아마존 북스토어에 연결해 전자책을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정말 킨들이 네그로폰테와 고딘이 지적했던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인가? 킨들이 책의 문화적 감수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책을 통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튠즈와 아이팟을 들고 부활해 아이폰과 앱스토어를 밟고 아이패드로 치고 달리고 있는 그가 믿기엔, 이용자는, 소비자는, 그들이 원하는 이용자 경험은 더 싸고 편리한 것과 동시에 더 낫고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것이 PC도, 넷북도, 킨들도 아닌 애매한 아이패드다.

아이패드는 전통적인 컴퓨터광인 기크(geek)들에게는 컴퓨터에 잠금장치를 해놓은 저주의 장치(lock-in devise)였지만, 콘텐츠 소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대중성을 지닌 킬러 아이템이다. 무엇보다 킨들이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아이패드는 이용자 경험 확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승기를 잡을 것인가? 두 월드컵 우승후보의 경기와 같은 빅매치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네그로폰테와 세쓰 고딘의 조언을 생각해보면, 비용 절감만으로는 전자책이 종이책을 죽일 수 없다. 이용자 경험 확대 그리고 거기에 감수성의 포인트가 더해져야 한다. 잡스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있다. 잡스의 주특기는 보수적 혁신가로서 혁명가의 사상과 대중의 욕구 사이에서 적절하고 세련된 균형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즈앤노블스 등 대형 서점의 온라인화 전략과 전면전을 벌였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생존 닷컴 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 대담성을 가지고 장기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괴물이다. 그러나 아마존은 나폴레옹이다. 혁명을 위해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를 9.99 달러로 제공하는 킨들의 초기 판매 전략은 출판사들의 이해관계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출판사들은 그 같은 판매전략이 그들의 장기적 생존을 위협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역사는 반복된다. p2p 기술로 인한 불법 음악파일 유통이 음반 회사들의 이해관계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양쪽은 법적 공방을 계속해 갔지만, 결과적으로 p2p 기술 서비스는 이용자들이 만족할 안정성을 가져다 주지 못했고, 음반 회사들은 기술 혁신을 외면하고 기존 비즈니스 모델만 고수하기 어려웠다. 이 때 잡스가 아이튠즈와 아이팟을 내걸고 양쪽이 부족했던 필요를 채워줬다. 그것이 잡스의 기지다. 그리고 같은 지혜가 이제 출판시장에서 아이북스와 아이패드로 반복되고 있다. 잡스는 소비자에게는 더 감각적인 만족을, 공급자에게는 더 나은 협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물적인 유연성으로 선두주자로서 출판시장에 진입한 아마존의 아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거듭 말하지만, 지금은 속단은 어려운 상황이다. 아직 빅 플레이어가 하나 더 남아 있다. 구글 북스 문제로 법적 소송 절차를 거친 구글도 구글 에디션을 들고 대량 콘텐츠 압박 전술과 오픈 생태계 전략을 가지고 출판시장을 노린 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에 주인공들이 다 올라서고, 그들의 본격적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여전히 승자를 점치긴 어렵다.

더구나 역사는 늘 단순한 예측을 배신해 왔지 않은가. 영상이 활자를 대체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 온라인에서 가장 유력한 서비스 중 하나인 트위터는 기본적으로는 철저한 140자의 언어 마술에 의지한 서비스다. 활자는 살아 남았다. 다만 그 메시지는 진화된 미디어를 타고 흐를 뿐이다. 여전히, 단순한 형태로 가장 많이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활자이기 때문이다. 아이패드의 멀티미디어 능력은 단연 킨들보다 출중하지만, 킨들의 활자 중심 전달 능력과 아마존의 DB와의 연동 잠재성, 그리고 이미 확보하고 있는 방대한 시장 등은 결코 애플의 위용에 비해 처지는 전력이 아니다. 역사적 흐름이 무조건 진보와 보수를 택하지 않고 그 중간의 역동적인 조합을 택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았을 때, 따라서 해볼 만 한 싸움은 아직 남아 있고, 승자를 예고하는 근거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전자책이 과연 종이책을 죽일 것인가. 소비자가 아마존, 애플, 구글 이들 중 누구를 어떻게 왜 선택하느냐 하는 이슈가 아직은 불명확한 이 문제를 푸는 한 단초를 제시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 세대의 메시지를 전달할 미디어를, 지식과 정보의 핵심적인 유통 체계를 대체하는 미래의 전망과 비전, 그리고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해줄 것이다.

Steve_Jobs_WWDC07
▲ Steve_Jobs_WWDC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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