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셜 디자인'은 말 그대로 '보편적 설계'를 뜻한다. 무엇을 그렇게 설계한다는 얘길까. 여기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쓰는 모든 제품이나 환경, 서비스를 아우른다. 비장애인 뿐 아니라 장애인과 고령자 등 이른바 '접근성'에 제약을 가진 이들도 똑같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쓰도록 하자는 얘기다.

미국에서 시작된 유니버셜 디자인 개념이 국내에서도 확산되는 추세다. 헌데 우리는 과연 제대로 유니버셜 디자인에 접근하고 있을까. 이성일 성균관대학교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말한다. "실제 제품을 쓰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사전 조사 없이 창의적 아이디어나 디자인 측면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란다.

이성일 교수는 무엇보다 '기준'이 없다는 데서 원인을 더듬는다. "2000년께 당시 한국전산원을 통해 '장애인, 노인 등의 정보통신 접근성 향상을 위한 권장 지침'을 몇몇 분들이랑 만들었습니다. 지금 보면 지침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원칙을 제시한 수준이었죠. 세부 사양과 이를 기업 단위로 적용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 등은 빠져 있었습니다. 기업들의 부담을 반영하다보니 구체적 적용 방법도 제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강제성도 없는 채 발표가 됐죠. 2009년 개정안이 발표되며 지침이 세부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권장 수준이라,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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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기업이나 공공기관도 애써 보편적 접근성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더하는 대신, 장애인을 위해 '특별한' 보조기기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현실이다. 이를테면 장애인을 위한 PC용 보조기기나 지팡이, 휠체어와 돋보기 기능을 제공하는 식이다. 이성일 교수가 아쉬워하는 대목도 여기다. 이런 '특별한' 보조기기는 '이쪽'(비장애인)과 '저쪽'(장애인) 영역을 애당초 나눠놓고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란다.

"대개 정부에서 장애인에 접근하는 방식 밑바탕엔 '복지'란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를 재분배하거나 재정을 지원해 장애인에게 '혜택'을 주자는 생각으로 접근하죠. 그렇게 해선 사회 간극이 좁혀지기 어렵습니다. 비장애인이 쓰는 물건을 장애인이나 고령자도 똑같이 쓸 수 있게 하면 자연스레 벽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려면 메인스트림 프로덕트(범용 제품)의 접근성을 보장해주는 일이 핵심이죠. 재활공학이 장애인도 비장애인 영역으로 오는 데까지 돕는 학문이라면, 유니버셜 디자인은 비장애인 영역으로 다가온 이후 함께 생활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버셜 디자인과 재활공학이 추구하는 방향은 다른 셈이죠."

이성일 교수도 처음부터 유니버셜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대학에서 인간공학 분야를 공부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우연찮게 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분야를 만나며 연구 물길이 바뀌었다. 그는 유학시절, 장애인 피실험 진행 과정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고 한다.

"50대 후반 시각장애인 아주머니를 피실험자로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실험이 끝난 뒤 택시를 부르고 아주머니를 승차장까지 모셔다드리고 연구실에 돌아와 1시간쯤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다시 내려갔는데요.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계속 서 계신 거에요. 깜짝 놀라 여쭤보니, 오기로 한 택시가 아직 안 왔다는 겁니다. 당시엔 휴대폰도 보편화되지 않았고 달리 도움을 청할 방법도 없어서, 1시간 넘게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 분은 그런 일이 더러 있다고 무덤덤히 말씀하시더군요. 그 때 느꼈던 놀라움과 안타까움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성일 교수는 "사회 모든 분야에 강제화하긴 어렵다 하더라도, 국민 세금이 쓰이는 분야에선 유니버셜 디자인이 의무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애인도 세금을 내는 국민인데, 공공 시설을 비장애인처럼 쓰지 못하는 건 문제가 있기 때문"이란다. 이를 실현하려면 정부나 공공기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그어놓은 선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이성일 교수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기업이든 정부든, 장애인 고용에 인색합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고 벌금만 내면 그만이죠. 그러니 전자정부에서 접근성 지원 민원 서비스는 하더라도, 장애인 접근성을 지원하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는 구매하지 않습니다. 민원인 같은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접근성 지원만 고려할 게 아니라, 실제 같이 일하는 장애인 동료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보편적 설계를 고려하는 일이 한결 쉬워지지 않겠어요?"

이른바 '책상물림'식 유니버셜 디자인 연구 경향도 걱정스러워한다. "유니버셜 디자인이 건축 분야에서 시작해 제품 디자인으로 넘어온 학문인데요. 그 과정에서 창의적 설계나 디자인에 집중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실제 구현 단계까지 나아가려면 세밀한 공학적 접근과 실제 장애인 사용자 평가가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도 아직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일본은 규체적 규격과 표준을 만들고 장애인과 고령자를 위한 평가 방법론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구체적 방법론을 간과하고 창의적 아이디어 중심으로 접근하는 건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다보니 '장애인 현실을 모르는 장애인용 솔루션'도 적잖이 나온다고 이성일 교수는 지적한다. "두 가지 대표 사례가 있어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제공하면 모두 해결된다는 생각과, 청각장애인에게 수화 기능을 제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시각장애인은 10% 밖에 안 되는데 말이에요. 관찰과 체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머릿속 생각만으로 유니버셜 디자인을 적용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이죠."

보편적 설계 지원에 인색한 대기업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국내 대기업들은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할 기술도, 재원도 갖추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 제품에 적용하는 일은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아이폰처럼 접근성이 잘 보장된 스마트폰이 들어오면서 국내 시각장애인 상당수가 기존 휴대폰을 버리고 아이폰으로 갈아탔어요. 이들은 나중에 국내 기업이 더 나은 접근성 기능을 제공한다고 해도 어지간해선 돌아오지 않습니다. 장애인은 제품 충성도가 높은 고객입니다. 웬만해선 기존 제품을 버리고 새 환경으로 갈아타려 하지 않으니까요. 이런 충성도 높은 고객을 스스로 발로 차는 국내 기업들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같은 숙제들을 풀어낼 방법은 없을까. 결국은 장애인과 접근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방법이 지름길인 모양새다. 다행히 요즘엔 대학에서도 유니버셜 디자인을 제대로 접근해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란다. "하지만 교과과정은 아직 부족한 형편이에요. 그러려면 유니버셜 디자인과 장애인·고령자 접근성을 연구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하겠죠. 유니버셜 디자인은 학문적으로도 매력 있고 아직은 개척할 연구 영역이 넓은 분야입니다. 지금은 수요도 적고 산업 규모도 어림잡기 어렵지만, 가능성은 충분한 영역인 셈입니다."

이성일 교수는 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셜 디자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그는 장애인 IT 접근성 분야 세계적 권위자인 그레그 밴더하이든 미국 위스콘신-메디슨대 교수 지도를 받았다. 국내에선 금융자동화기기 접근성 지원 프로젝트를 비롯해 범용 제품과 서비스에 장애인·고령자 접근성 지원을 돕는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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