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11일 발효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깊은 유리 골짜기를 잇는 다리다. 이 법률에 따라 2013년까지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뺀 모든 웹사이트는 장애인도 주요 기능을 무리없이 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 적어도 웹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간 이용 차별을 없애자는 게 이 법이 나온 이유다.

그렇다면 2년 뒤, 장애인차별금지법만 제대로 지키면 장애인도 차별 않는 웹 세상이 다가올까. 김석일 충북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골짜기를 메우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김석일 교수는 해외 유학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80년대, 미국에서 '병렬컴퓨팅'을 공부했다. 그런데도 김 교수 뒤엔 전공과 무관해보이는 '장애인'과 '웹', '접근성' 같은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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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일 충북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시작은 '막연한 부채감'이었다. 어려운 시절, 흔치 않은 유학 기회를 누린 '복'을 사회에 되갚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다가 1990년, 충북대 교수로 부임하고 청주맹학교 교장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면서 삶의 물길이 바뀌었다.

"그 교장선생님은 '장애인도 앞으로는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컴퓨터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만 해도 꽤나 앞서가던 분이셨죠. 때마침 청주맹학교가 한국IBM 사회공헌사업 재단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시각장애인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게 됐는데요. 교장선생님이 알음알음으로 제게 연락을 주셔서, 시각장애인용 SW 개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1995년 내놓은 첫 제품은 '소리문'이란 시각장애인용 워드프로세서였다. MS-DOS 기반 워드프로세서로, 점자 입출력에 점자 인쇄까지 지원하는 획기적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국내 시각장애인 치고 '소리문'을 안 쓴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소리문' 기능을 보강한 '새소리문'을 2년여 개발 끝에 공개하기도 했다.

'윈도우95'가 나오면서 시각장애인들은 다시 접근할 수 없는 벽에 맞닥뜨렸다. 당시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들이 윈도우95란 운영체제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석일 교수는 '웹아이'란 시각장애인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웹브라우저와 통합한 애플리케이션 방식이었는데요. 윈도우95에서 시각장애인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도운 최초의 프로그램이죠. 시각장애인용 e메일 클라이언트도 만들었고요. 시각장애인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그렇게 '장애인'과 '웹'이 김석일 교수 평생 과제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를 시작으로 김석일 교수는 2003년부터는 당시 정보문화진흥원이 웹문서 접근성 지침(WCAG)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참여했고, 한국웹접근성그룹(KWAG)을 비롯해 국내 웹접근성 지침이나 정책을 만드는 움직임마다 김 교수 발자취가 따라다녔다. "사회 봉사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 주전공으로 바뀐 셈이죠, 허허."

이런 김 교수의 노력은 기대만큼 결실을 맺었을까. "2년 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 국내 웹사이트들이 장애인 웹 접근성을 의무 제공하게 될 텐데요. 보이는 웹 뒤편이 더 큰 문제입니다. 기업 자원관리(ERP)나 인트라넷 서비스, 통합 교육망처럼 제한된 구성원들만 쓰는 웹에선 아직도 접근성을 지키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분위기에요."

예컨대 2009년부터 직원 300명이 넘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웹사이트 뿐 아니라 인트라넷에서도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까. "국내 대기업이나 학교에도 시각장애인 직원이나 교사, 학생이 있을 텐데요. 이들이 기본 업무나 학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부망은 접근성 문제에 여전히 사각지대입니다. 기업이나 국가의 의지 문제만은 아니에요. 만든지 5~10년이 된 인트라넷은 애당초 설계부터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았거니와, 여러 응용프로그램이 맞물려 있게 마련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구축하지 않고선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만 해도 그렇다. 장애인 접근성은 둘째치고, 상호운용성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특정 운영체제나 웹브라우저가 아니면 접근조차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교육인적자원부가 '차세대 나이스' 시범 운영을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애당초 처음부터 접근성과 상호운용성을 고려해 설계했다면 '접근성을 보장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핑계는 애당초 나오지 않았을 일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정부 기관이 보이는 웹 뿐 아니라 기업 인트라넷과 제한된 내부망도 상시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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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아이(WebEye). 사진 : 백남중 블로그(http://njpaiks.egloos.com/88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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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문'과 '새소리문'


김석일 교수가 정작 조급해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웹을 넘어 보편적 접근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도 접근성 지원 대상을 웹 콘텐츠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SW나 정보통신 기기 전반으로 접근성 지원이 확대되지 못하고 있죠. 스마트폰이나 유선전화부터 장애인들이 업무를 볼 때 쓰는 PC나 프린터,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금융자동화기기나 지하철 티켓 발권기처럼 일상 생활에 반드시 써야 하는 기기들은 하루빨리 장벽을 제거해야 합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21세기 통신 및 비디오 접근성 법’(이하 21세기법)을 통과시켰다. 스마트폰이나 TV, 인터넷전화 등에서 장애인 접근성 보장을 의무화한 법이다. 21세기법을 지키지 않는 제품은 미국내 수출이 금지된다. 국내 업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정보통신 기기나 SW에서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도록 의무화하는 규정 자체가 없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정보통신 분야에 확대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도 아직은 논란거리다. 김석일 교수는 "접근성이 복지 차원을 넘어 비즈니스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라며 "법 해석에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정보통신이나 SW 분야의 접근성을 보장하라는 대목을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명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석일 교수는 요즘 새로운 숙제에 매달리고 있다. 웹사이트나 SW의 접근성을 평가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웹이든 앱이든, 접근성 평가 과정을 자동화하기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특정 방식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은 주관성이 개입되는 영역이죠. 문제는, 접근성 평가 과정에 걸리는 문서 작업이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 있습니다. 측정 결과를 자동으로 문서로 만들어주기만 해도 일정이나 노력이 훨씬 단축되죠. 지금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중인데, 아직은 이용한 분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어설픈 도움이 되레 장애인 접근성을 망치는 사례도 적잖다. 김석일 교수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장애인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이 어림짐작해 내놓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적잖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죠. 형식상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실 있는 접근성을 보장하는 방법을 컨설팅하고 함께 만드는 일에 요즘 몰두하고 있어요. 외국만 봐도 장애인 접근성 분야를 다룬 표준이나 지침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분위기인데요. 한국도 형식적 참여에 그치지 않고, 국제 협력을 통해 표준을 제안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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