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나온 교육 자료들은 대개 플래시나 PDF 파일로 제작돼 있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은 이용할 수가 없어요. 진입 단계부터 교육 기회를 차별하는 셈이죠. 콘텐츠 제작자나 개발사가 조금만 더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해 제작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노석준(45)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주변에 널린 교육 자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배운 것도, 직업도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교육공학을 전공 삼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게 2004년 8월. 한국 사정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유학 시절, 대학 안에 보조공학센터가 있었어요. 거기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이나 다른 장애인들이 도서관을 이용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체험하게 됐죠. 미국에선 장애인의 학습권을 보장해주는 여러 지원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요. 그걸 보며 저도 이들을 위해 학자로서 무언가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온라인 교육과 장애인 웹접근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됐습니다."

노석준 교수는 "무엇보다 교육 콘텐츠와 온라인 교육 시스템에 장애인 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건물이나 시설에선 장애인 접근성이 많이 향상된 편이지만, 교육 콘텐츠나 교구로 가면 여전히 갈 길이 먼 형편입니다. 언제부턴가 국내 교육 콘텐츠는 플래시가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데요. 플래시도 요즘엔 접근성이 많이 향상됐는요. 문제는, 만드는 사람이 이를 지키지 않는 겁니다. 그게 국내 온라인 교육 시장의 한계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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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만 제대로 만든다고 길이 뚫릴까. "교육 콘텐츠를 만들려면 전용 소프트웨어(SW)나 솔루션이 필요하죠. 그 콘텐츠를 얹어놓고 교사나 학생이 접근할 수 있는 교육관리시스템(LMS)이나 교육콘텐츠관리시스템(LCMS)도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교육 콘텐츠를 만들게 돕는 SW들이 제작 과정에 장애인 접근성 기능을 제공하게 해둔 게 거의 없습니다. LMS나 LCMS도 마찬가지고요. 시각장애인 학생이 교육 자료에 접근할 수도 없고, 겨우 찾아냈다 해도 읽어들일 수 없으니 무용지물인 셈이죠."

이는 단순히 저작도구나 콘텐츠 제작자의 인식 부족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노석준 교수는 "대학이나 교사들의 경제적 여건도 한몫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대학 교수들은 대개 이렇습니다. 강의 자료 파워포인트 파일을 플래시로 변환해주는 저작도구를 쓰곤 하는데요. 예컨대 이런 저작도구를 써서 동영상에 자막을 넣기도 어렵습니다. 청각장애인에겐 동영상이 무용지물이죠. 직접 고급 저작도구를 써서 강의 자료를 만들면 되지 않냐고들 하시는데요. 그런 도구를 다루는 전문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제작 시간도 맞추기 만만찮습니다. 더구나 그런 도구들은 가격도 만만찮아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값싼 저작도구를 쓰고, 콘텐츠 접근성이 배제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듣고보니, 암초는 곳곳에 널려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노석준 교수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쓰는 교육 정책을 마련하자"라고 제안한다.

"미국은 장애인 접근성을 지원하지 않는 교육용 SW는 공공기관에 납품할 수 없도록 법으로 못박고 있습니다. 또한 접근성을 잘 지키는 곳엔 세제 혜택을 주는 식으로 보상을 해주죠. 국내에서도 대학이나 공공기관이 접근성을 지킬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예컨대 노석준 교수는 "온라인 교육 시스템이나 SW를 평가할 때 '접근성 지원' 항목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온라인 교육 솔루션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고 있는 곳인데요. 이 평가에 따라 업체에 돌아가는 혜택에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러니 평가 항목에 장애인 접근성 평가를 더하면, 업체들도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접근성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겠죠. 이런 식으로 강제하는 방법이 반드시 옳은 지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강력한 접근성 지원 요구가 나와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교재를 만드는 노력도 더해야 한다. "미국에선 종이책을 일일이 스캔해 광학 문자인식기로 돌려 텍스트 파일로 만들어 장애인 학생에게 무료로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학생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하죠. 국내에서도 종이 교재만 줄 게 아니라, 전자책이나 텍스트 파일 같은 디지털 교재 형태를 함께 제공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장애인 학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교재를 보급하는 일이죠. 저작권 문제가 논란이 될 순 있지만, 미국에선 출판사에 세제 혜택을 주는 식으로 푼 사례가 이미 있습니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아직도 교육 현장에선 '장애인 접근성'이란 개념조차 모르는 이가 적잖다는 점이다. 교육공학과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함께 공부한 노석준 교수에겐 기기(하드웨어)와 콘텐츠(소프트웨어)를 모두 고려한 접근성 지원 노력이 부족한 점이 늘 안타깝다고 한다. 노석준 교수는 대학 부임 이후 매 학기마다 1권 꼴로 책을 번역해 내놓았다. 이같은 인식부터 더 널리 퍼뜨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나마 요즘 대학생들에게선 희망이 보인다고 한다. "요즘 학생들은 통합교육이 실시된 이후 세대입니다. 교실에서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받은 경험들이 더러 있더군요. 그래서 장애인 접근성을 지원하는 걸 특별한 배려라기보다는 당연한 일로 여기는 학생이 눈에 띄게 늘어났어요. 이 아이들이 일선 교육현장으로 속속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노석준 교수는 사범대 2학년 때 장애인 특수학교 실습을 나갔다가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군 입대 전에는 전라남도 섬마을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며, 교육 여건이 뒤떨어진 학생들을 돕는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교육공학을 전공한 노 교수가 미국에서 보조공학을 주제로 복수전공 과정을 밟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개인 사정으로 복수전공을 끝마치지 못하고 부전공에 그친 일은 지금도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박사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동료 한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넌 한국에 가서 뭘 하고 싶냐고. 그 때 제가 뭘 해야 할 지 마음을 굳혔습니다. 미력하나마, 한국에서 온라인 교육과 관련된 웹접근성을 향상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기왕이면 상황을 보다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나 법, 지침을 만들고 시행하는 데 한몫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인식만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위한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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