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에서 게이머가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사이, 무심결에 지나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총소리 사이로 울려 퍼지는 게임 음악이 그렇고, 칼을 쥔 캐릭터가 누비는 이야기가 그렇다. 이 중에서도 이야기는 게임 속에서 영화나 소설, 드라마의 그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캐릭터가 칼을 휘둘러야 하는 목적이요, 게이머가 게임에 빠져들 수 있는 명분이다.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게임을 해야 할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게이머가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주는 감성적인 부분을 게임에서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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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준석 감독은 게임 시나리오가 갖는 가치를 설명했다. 잘 짜인 게임 시나리오는 게임을 단순히 '플레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게임과 게이머 혹은, 게이머와 게이머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화가 된다는 게 변준석 감독의 믿음이다. 변준석 감독은 현재 국내 게임개발업체 씨드나인게임즈에서 '마계촌 온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영화감독 출신이 만드는 '마계촌 온라인'의 시나리오 세계에 귀를 기울여 보자.

'마계촌 온라인'은 1985년 일본 캡콤에서 개발한 '마계촌'을 원작으로 하는 국산 MORPG다. 횡스크롤로 진행되는 온라인 게임으로 팬티 한 장 걸친 왕국의 기사가 마물에 납치된 공주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준석 감독은 원작의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는 중이다. 물론 큰 줄기는 원작과 같다. 납치된 공주를 구하라.

"원작은 공주가 납치당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약하고 착한 공주를 구한다는 익숙한 이야기도 재미있겠지만, 기왕 공주를 구하려면 공주가 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변준석 감독의 상상력은 '공주는 왜 납치됐을까'부터 시작됐다.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세상과 이들을 지배하는 천계의 존재는 여기서 나왔다. 마물의 우두머리는 공주를 납치해 음모를 꾸미고, 인간은 공주를 되찾아오기 위해 험난한 모험을 시작한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공주를 납치한 마물 우두머리 '레드아리마'가 꾸미는 음모는 사뭇 진지하다. 게임 속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인 9개 '씨드'의 존재도 공주와 치밀하게 엮여 있다. '마계촌 온라인'의 공주는 게이머가 게임 속에서 마물에 대항해 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로 둔갑했다. 예쁘고, 여리고, 착하기만 했던 공주가 까칠하고, 강직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설정도 원작의 시각을 넓혔다.

원작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부분도 있다. 마을에서 게이머에게 임무를 주거나 상점 주인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NPC: Non Player Character)의 코믹한 대사나 '마계촌 온라인' 전체를 따라 흐르는 익살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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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쓴 이야기를 딸들도 잘 안 보더군요. 한 딸아이는 이야기를 읽어보고 게임을 하는 데 반해, 또 한 딸아이는 게임 속 이야기를 전혀 읽지 않고 게임을 즐기더랍니다."

변준석 감독의 농담 섞인 푸념도 재미있다. 비공개 시범서비스(CBT) 기간 동안 변준석 감독의 초등학생 두 딸 영빈이와 수빈이가 테스터로 참여했었다. 게임 시나리오를 쓴 건 아빤데, 정작 게이머인 두 딸은 이야기보다 게임 속 그래픽과 화려한 타격감에 빠져들었다는 설명이다. 어디 수현이와 수빈이 뿐이랴. 많은 게이머가 게임의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변준석 감독의 생각도 사실은 이와 비슷하다. 게임은 감상보다는 플레이가 중심이 되는 콘텐츠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야기 없는 게임이 문화적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변준석 감독이 두 딸에게 이야기가 흐르는 게임을 선물하고픈 이유다. 게임 속 이야기에 힘이 실리고, 게이머가 이를 알아볼 때 게임은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마계촌 온라인'의 이야기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정식 서비스와 꾸준한 판올림을 통해 한 꺼풀씩 공개될 예정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2시간 안에 결판나는 영화와 반영구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 게임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계촌 온라인'은 특히, 일정 기간 동안 판올림을 제공해야 하는 온라인 게임이다. 변준석 감독이 가장 고민했을법한 부분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일직선으로 흐른다면, 게임의 이야기는 융통성 있게 작업해야 했습니다. 게이머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간에도 언제든 뒤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죠."

게임 속에서 임무를 받고 어떤 일을 했을 때, 게이머의 행동에 의해 변화된 부분이 반영돼야 한다는 뜻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영화의 흐름과 다른 부분이다. 영화는 대부분 대사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게임은 주로 NPC의 말을 들으며 진행해야 한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변준석 감독은 "말을 못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자"라며 영화와 게임을 구분했다.

영화와는 다른 게임 시나리오 작업이 주는 매력이 있을까. 변준석 감독은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율성을 게임 시나리오 작업의 재미로 꼽았다.

"게임을 좋아해서 '마계촌 온라인'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지만,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이게 한국에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쓰는 시나리오가 SF나 판타지 장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작비가 100억은 들 겁니다."

평소 쓰던 시나리오 장르를 설명하며 멋쩍게 웃었지만, 변준석 감독은 100억원을 넘게 쏟아 부어도 만들기 어려운 이야기를 게임 속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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