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주체가 정부만 있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결제 업체가 결제 시스템을 지원할지를 두고 특정 표현물이 대중과 만나게 할지를 정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인디작가들이 자유롭게 책을 판매하는 스매시워즈북스트렌드, 엑세시카 등은 지난달 페이팔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다. 미국 온라인 결제 업체 페이팔은 이들 서점에 성애물 카테고리에 있는 모든 책에 대해 결제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페이팔은 성애물 카테고리에 있는 책들이 근친상간과 허위 근친상간, 수간, 기학적 성적 성향 등 음란한 콘텐츠를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페이팔은 e메일과 전화로 해당 카테고리에 있는 책을 지우라는 요구까지 했다.

페이팔의 음란물 검열은 정식 공문도 없이 시작됐지만, 진행 과정이 조용하지는 않았다. 각 업체마다 작가들에게 공지를 내면서 미국의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이 알게 돼 페이팔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전자프론티어재단은 "페이팔은 책 검열을 그만두라"라고 주장했다.

전자책 서점과 전자프론티어재단은 페이팔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겼다. 특히 전자프론티어재단은 "저자와 독자 사이의 표현의 자유의 연결을 지원하는 링크를 지원하는 페이팔과 무수히 많은 결제 절차는 도덕적인 정책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페이팔이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특정 책을 판매할지를 정할 권한은 없다는 이야기다.

페이팔은 그동안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책이 자기의 결제 솔루션을 통해 판매되는 게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국 온라인 상거래에서 인기 있는 결제 솔루션 제공자가 어떤 책을 팔고 말지를 정한 데서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 문제로까지 불씨가 옮아갔다.

문제는 점차 커져 전자책 독자 커뮤니티뿐 아니라 3월 들어 로이터통신에도 알려졌다. 결국 페이팔은 기존 정책을 수정하기로 3월13일 결정했다. 이전까지는 성애물에 포함하는 모든 책에 관한 결제를 지원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페이팔이 꼽은 특정 책으로 범위를 좁히기로 했다. 선정 기준은 책과 이미지를 포함한 출판물로, 이미지가 음란할 때로 한정했다. 여기에서 음란한 정도는 미국 법계가 정의한 기준에 따른다고 페이팔은 밝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란물인지 여부를 판단하고 결제 지원 여부를 페이팔이 정하겠다는 방침은 변함이 없다.

국내 로맨스 소설 전문 전자책 서점 '피우리'의 이완섭 대표는 "결제 시스템을 제공할지는 페이팔의 자유이지만, 그렇다고 페이팔이 온라인 내 모든 성적 콘텐츠에 대한 결제 지원을 안 하는 건 아니잖은가"라고 이번 정책이 다소 자의적 잣대에 따른 결정이었음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페이팔이 자사 이미지가 추락해 수익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도덕적인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북스트랜드 성애물
▲ 북스트랜드 성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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