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전 소문이 돌 때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나온다면 그저 30핀 커넥터만 라이트닝으로 바뀐 것이길 바랐다. 10월26일 80분 동안 숨가쁘게 흘러간 키노트에서 이 '4세대 아이패드' 소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마치 '아이패드 미니'를 소개하기 위한 ‘배경’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3세대와 4세대 사이의 갈등

애플로서도 이 제품을 오랫동안 자세히 설명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3세대 제품이 등장한 지 불과 7개월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표와 동시에 3세대는 족보에서 사라졌다. 3세대 제품을 구입한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한 달 이내에 구입한 소비자들에게는 다른 제품으로 바꿔주겠다고 했지만 서둘러 구입한 소비자로서는 '1년에 한 가지'라는 암묵적인 약속, 혹은 기대가 깨진 게 마냥 서운할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런 디자인 변화 없이 프로세서와 커넥터만 바뀌어 나온 4세대 아이패드는 애매한 출시 시기가 아니었다면 애플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을 법하다. 새 프로세서의 성능 향상폭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미리 얘기하자면 A6X와 라이트닝 외 나머지 부분은 크기, 두께, 무게까지 정확히 3세대와 똑같다. 애플에게 4세대 아이패드에 대한 관심사는 딱 하나, 성능이라는 얘기다. 이 점은 애플이 출시를 서둘렀다는 흔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이패드의 프로세서는 1세대 A4 프로세서에서 시작해 2세대 A5, 3세대 A5X를 거쳐 4세대 A6X로 발전해 왔다. A5 프로세서는 A4에 비해 성능이 크게 늘어났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쓴 3세대에는 이를 개선한 A5X 프로세서가 들어갔다. 하지만 A5X는 CPU 자체의 성능은 A5와 똑같은 1GHz 듀얼코어 프로세서였고, 4배 늘어난 픽셀을 처리하기 위해 그래픽 프로세서 성능이 개선됐다.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고 플래시메모리 속도가 빨라진 정도의 차이였을 뿐, 실제 체감되는 성능 차이는 크지 않았다.

겉은 똑같지만 성능은 2배 이상

반면 4세대 아이패드에 들어간 A6X 프로세서는 성능이 크게 개선됐다. 애플은 아이폰5의 A6를 발표할 때와 마찬가지로 4세대 아이패드의 A6X가 A5X보다 CPU와 GPU 모두 2배 가량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geekbench2performance test 등의 벤치마크 앱을 돌린 결과로도 2배 이상 빨라졌다. 정확한 발표는 없었지만, 벤치마크 테스트 앱들은 A6X를 1.4GHz로 작동하는 듀얼코어로 인식했다. 아이패드로서는 처음으로 1GHz 이상으로 작동속도를 올린 셈이다. 또한 아이폰5에 들어간 A6와 마찬가지로 이전 세대에 비해 아키텍처의 개선이 더해져 2배 성능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


▲Geekbench2 테스트 결과 4세대 아이패드는 3세대에 비해 2배 이상의 프로세서 성능을 보여준다. 실제로도 더 날렵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iOS 애플리케이션의 특성상 아직까지 대부분의 앱은 로딩 속도 정도의 차이 뿐이고 애플리케이션 작동 속도나 게임의 프레임 처리도 거의 같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앱들이 3세대 아이패드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직접적으로 성능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지만, 정식 출시 이후 A6X의 성능을 십분 활용하는 게임 앱들이 선보일 전망이다. 아이패드 발표 현장에서 본 일부 게임들의 데모는 웬만한 PC게임 이상의 품질을 냈다.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성능 향상의 효과는 다른 쪽에서 나타났다. 발열 문제다. 3세대 아이패드의 경우 발열 문제가 꾸준히 지적돼 왔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고스란히 쓰는 '인피니티 블레이드2' 같은 게임을 돌리면 이내 뜨거워진다. A5X 프로세서가 갖고 있는 온힘을 다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4세대 아이패드는 프로세서 성능에 여유가 생겨 아이패드2 수준으로 거의 열이 나지 않는다. A6X의 성능을 고스란히 당겨쓰는 앱이나 게임이 나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레티나 디스플레이용으로 나온 앱들로는 아이패드를 뜨겁게 달구지 못했다.


▲인피니티 블레이드2 같은 레티나 디스플레이용 게임들을 돌려도 딱히 열이 나지 않는다. 성능에 여유가 생겼다는 얘기다.


'아이패드 미니' 의식한 성능 개선

애플이 4세대를 서둘러 발표한 이유를 성능과 맞물려 짚어보자. 이전까지 아이패드2와 3세대 아이패드는 디스플레이로 큰 차별점을 둔 바 있다. 하지만 아이패드 미니가 화면 크기만 다를 뿐 아이패드2와 성능을 똑같이 맞추다보니 3세대 아이패드까지 3가지 제품으로 라인업을 만들면 화면 외에 성능면에서는 이렇다 할 차이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9.7인치 최상위 모델은 디스플레이부터 성능까지 모든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둘 필요가 있다. 3세대 소비자들에게 불만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A6X와 4세대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은 것은 애플다운 고집이다.


▲애플의 모든 주력 기기는 라이트닝 포트를 갖게 됐다.


라이트닝 포트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애플은 9월 아이폰5와 새 아이팟들을 내놓았고 10월 새 아이패드들을 내놓으면서 단 2개월만에 30핀 포트를 지워버렸다. 10년 동안 써 오던 인터페이스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또한 콘텐츠 중심의 7인치대와 달리 성능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10인치 시장에서 무섭게 치고 오르는 구글의 '넥서스10'이나 윈도우8 기기들도 신경쓰인다.

그렇다면 아이패드 발표 시기도 매년 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일까. 애플은 이에 대해 답하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매년 가을에 새 제품을 내놓을지는 알 수 없지만 9.7인치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A6X를 다 꺼내놓은 만큼 적어도 내년 봄 신제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이패드의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여전히 세밀한데다가 색 표현력도 좋다.


성능을 높인 9.7인치와 더 작아진 7.9인치가 추가되면서, 아이패드는 화면 크기에 따라 각자 역할이 뚜렷이 갈린다. 특히 9.7인치는 애초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할 때처럼 소파에 앉아서 쓰는 ‘카우치 PC’의 역할을 굳히게 됐다. 아이패드는 그 어떤 제품보다 순탄하게 흘러왔지만 이번 신제품은 냉혹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아이패드 미니에 잔뜩 관심이 쏠려 있는 시장은 4세대 아이패드를 ‘더 빨라진 신제품’으로 받아들일까, ‘성능 빼고 달라진 것 없는 재탕’으로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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