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건대 나는 미술사학 전공자도, 웹디자이너도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이라는 과목을 끔찍하게 여겼던 미술 문외한이다. 단지 이 글을 쓰기 위해 십여편의 미술사 논문과 관련 문헌을 뒤진 것이 전부다. 따라서 전문가의 식견으로 받아들이지도 객관적 논증으로 이해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애초 나는 ‘왜 IT는 지금 미니멀리즘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도입문 작성과 스토리 구성을 완료하고 하루 종일 써내려갔다. 기사의 시작은 이랬다.

“IT는 지금 미니멀리즘과 사랑에 빠졌다. 2012년 10월 윈도8의 메트로 디자인을 시작으로 2013년 iOS7, 2014년 구글의 머티리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IT 공룡들의 미니멀리즘 사랑은 좀체 그칠 줄 모른다. 언제부턴가 이들이 내세운 디자인 철학은 전세계 웹 디자인을 관통하는 핵심 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대세라는 수식어가 불편하지 않다.” […]

하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다. 플랫 디자인의 확산을 과연 미니멀리즘과의 사랑으로 표현해도 되는가. 이미 다수 해외 문헌과 전문가들은 플랫 디자인을 미니멀리즘과 등치시키고 있었다. 단순성과 명료성, 공간성, 환원성 등에 주목한 결과다. '윈도우8'의 메트로 디자인, iOS7의 플랫 디자인 모두 이러한 특성을 담고 있었다. 분명 그런 측면에서 미니멀리즘 요소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을 미학적 기원에서부터 찾아들어가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플랫 디자인을 미니멀리즘으로 보는 시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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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0px-Dieter_Rams_i_Dieter_Lubs-_Calculator_Braun_ET66-1987.dhub

▲브라운사의 총괄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계산기. 아이폰 계산기 앱의 물리적 원형이다. 


플랫 디자인을 미니멀리즘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대체로 관련 인물에 천착하거나 단순성에 주목한다. 애플은 전자에 해당한다. 애플의 플랫 디자인이 미니멀리즘적이라고 주장할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디터 람스다. 브라운의 다자인 총괄이었던 그는 애플 조너선 아이브의 디자인 스승으로 불린다. 조너선 아이브는 공공연하게 그가 디터 람스의 미니멀리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했던 아이폰의 계산기 앱은 디터 람스 계산기의 판박이라 할 만큼 닮았다.

스콧 포스톨 이후 애플 디자인을 총괄하게 된 조너선 아이브는 iOS를 플랫 디자인으로 빠르게 변경했다. 이를 두고 애플이 OS 디자인에 미니멀리즘을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곧잘 얘기된다. 때문에 조너선 아이브의 전면적인 등장을 미니멀리즘의 확산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났다.

반면, 박준우·김병택은 콘텐츠에 대한 존중, 명료함, 깊이에 대한 UI 구성 등 4가지 요소를 들며 iOS7의 UI 특성이 미니멀리즘적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미니멀리즘의 핵심 요소라고 말하기엔 다소 표피적이다. 미니멀리즘은 태동기 당시 작가의 예술적 개입 배제를 표방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작가보다는 관객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반예술적이고 반문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니멀리즘을 그저 단순함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과 평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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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버그가 모더니즘적 평면성의 사례로 언급한 에두아르 마네의 1872년 작품 '베르트 모리조'.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미니멀리즘은 오직 ‘단순함’일까? 진중권은 말한다. “우리는 이미 미니멀리즘의 심플한 디자인에서 미적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식의 수용은 미니멀리즘이 애초에 설정한 목표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단순함은 미니멀리즘이 애초 설정한 목표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사실 1960년대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진영이 인간형태주의를 놓고 벌인 논쟁을 보면,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순함이 아닌 르네상스적 환영성을 걷어내기 위한 방법을 놓고 벌어진 충돌이었기에 그렇다. 외려 단순함만을 놓고 본다면 20세기초 마네로부터 이어져온 모더니즘 예술도 배제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 답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서 찾을 수 있다.

1994년 타계한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미술평론가로 여러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에세이 ‘모더니스트 페인팅’은 지금도 수없이 인용될 만큼 모더니즘 미학을 대표하는 글로 평가받는다.

플랫 디자인을 이야기함에 있어 그의 모더니즘 미학은 놓쳐서는 안 되는 요소다. 그린버그는 이 에세이에서 모더니즘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했다. 평면성, 캔버스의 형태, 색채다. 이전 시대의 미술과 차별되는 모더니즘 미학의 속성으로 그가 제시한 구분법이다. 우리는 그가 유독 강조한 평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플랫 디자인과 얼마나 많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린버그의 평면성은 문학과의 결별, 조각과의 분리를 통해 회화만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 강조된 특성이다. 그린버그는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 작품을 공간감이 소멸된 평면성으로 보고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평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면성 하나만이 회화 예술에서 독특하며 배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닫힌 형태는 회화 예술이 무대 예술과 공유하는 제한 조건 내지 기준이었다. 또 색체는 연극뿐 아니라 조각과도 공유하는 기준 혹은 방법이었다. 평면성 즉 2차원성은 회화 예술이 다른 어떤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유일한 조건이었으므로 모더니즘 회화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적응하지 않는 한편, 평면성에 적응해갔다.”(참고 자료 : 모더니스트 페인팅)

모더니즘의 평면성과 플랫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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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windows-8-store-app-tile-bloatware-100260256-large

그의 주장대로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공간재현적 묘사, 3차원의 환영과 눈속임을 거부하고 회화 자체의 자율성을 지향한다. 공간감을 제거하고 캔버스의 2차원적 본질에 집중한 모더니티스들의 예술 작품은 지금의 플랫 디자인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윈도우8의 메트로 디자인이 대표 사례다. 사각형 캔버스의 기하학적 배열 속에서 3차원의 환영과 눈속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섀도우나 입체 효과를 시도한 과거 애플 아이콘들에서 시각적 과잉을 걷어낸 지금의 버튼 디자인도 다르지 않다.

유려하고 화려했던 이전의 아이콘들에선 모더니즘적 '회화성'이 비집고 갈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을 그대로 옮겨놓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공물의 모방만 가득 찼을 뿐이다. 애플 게임센터 앱의 카지노 펠트 재질 테이블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침내 플랫 디자인으로 들어서면서 평면성이 복원됐고 예술적 색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조각적 요소가 사라지고 회화적 감수성이 디지털 디자인에서 생명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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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dd.donald_untitled_1966-1968

▲미니멀리스트의 대가 도날드 저드의 무제. 3차원적 환영을 극복하기 위해 평면성으로 가기보단 3차원 공간으로 나아갔다. 


플랫 디자인은 그린버그의 관점에서 보면 스마트폰 스크린이라는 미디어적 본질, 즉 2차원 공간의 본질에 더 충실한 디자인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충분히 모더니즘적이다. 물론 스마트폰 스크린의 본질적 속성이 2차원적이라는 전제에서다.

반면, 플랫 디자인과 미니멀리즘의 가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미니멀리스트 작가 도날드 저드는 ‘환영의 공간’을 피하기 위해 3차원 공간 속으로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간다. 3차원 흉내내기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가 3차원이 돼버린 아마존 파이어폰의 OS처럼... 게다가 물체성을 강렬하게 추구한다. 그러나 도날드 저드가 고집했던 미니멀리즘의 물체성은 플랫 디자인으로 옮겨오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스큐어모피즘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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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blogazine-apple-skeuomorphism-4-20120918

플랫 디자인은 모바일 UI에서 스큐어모피즘의 복잡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대안이었다. 애플의 스큐어모피즘은 30여년 애플을 상징해왔던 디자인의 터줏대감이다. 아마 그린버그가  책장을 연상시키는 애플의 아이북스 UI를 봤다면 그는 “모던 이전”이라고 평가절하 했을 게다. 스큐어모피즘은 자연의 재현, 예술성의 거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스큐어모피즘은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적 경향성을 공유하고 있다. 애플이 OS 내에서 30여년간 지켜왔던 스큐어모피즘은 사물의 재현, 3차원적 환영의 눈속임을 시도했던 디자인 철학이었다. 책장을 연상시키는 아이북스 UI에서 스콧 포스톨은 평면적 스마트폰 스크린에 3차원의 효과를 불어넣어 인간의 시각을 조작했다.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 이전 르네상스적 환영의 재현과 맞닿아 있다. 르네상스 이후 전통 회화는 “그림이란 2차원의 표면에 3차원의 환영을 실물처럼,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일이라는 생각, 즉 환영주의”에 젖어 있었다.(참고 자료: 형식주의와 모더니즘) 따라서 스큐어모피즘 탈피는 디지털 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플랫 디자인은 디지털 모더니즘으로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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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os7_mini

나는 플랫 디자인을 ‘디지털 모더니즘’으로의 회귀로 바라본다. 미니멀리즘과의 교집합보다 모더니즘의 평면성과 더 깊게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에 그렇다.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아트 디자인 작가인 자넬 자라디지털 디자인의 평면화 경향에 주목하면서 “순수한 본질로 향하는 디지털 디자인의 가지치기는 디지털 모더니즘의 새로운 운동과 닮았다. 이러한 운동은 무척이나 순환적인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플랫 디자인은 미니멀리즘의 부상을 상징하는 코드가 아니라 디지털 모더니즘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린버그가 윈도우8, iOS의 플랫 디자인, 구글의 머티리얼 디자인을 직접 눈으로 봤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예술성으로 회귀, 이게 내가 말한 모더니즘이며 예술적 진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미학이 디지털 디자인의 사용성 극대화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가장 회화적인 것이 가장 이용자 친화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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