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 편의성에 관한 얘기는 해외에선 안 나와요. 이미 아마존 원클릭처럼 간편한 결제수단이 다 보급돼 있으니까요. 한국에서만 결제 편리성이 논란이 되죠."

현재오 글로벌콜렉트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업개발매니저는 한국 전자결제 시장이 지닌 폐쇄성을 꼬집었다. 글로벌콜렉트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전자결제회사(PG)다. 세계 170여개 나라에 전자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며 연간 4200억원 정도를 벌어들인다.

7월 초 현재오 매니저는 국내 전자결제 시장의 현실을 비판한 기사를 보고 기자와 통화하고 싶다고 e메일을 보냈다. 7월4일 오후 싱가포르 지사에 있는 현재오 매니저와 행아웃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오 매니저는 한국 전자결제 시장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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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ypal-here

▲간편결제의 대명사 '페이팔'이 내놓은 모바일 결제 단말기 '페이팔히어'(페이팔 웹사이트 갈무리)

간편결제, 세계 시장에선 당연한 얘기


“한국은 고객이 자기가 사기꾼이 아니라 선량한 고객이라는 걸 증명하고 들어오는 시스템이에요. 덕분에 결제 사기 피해가 정말 적어요. 한국 고객에게 결제 정보를 받아보면 부정사용률이 거의 0이더라고요. 반대로 보면 인증 단계가 너무 어려워서 매출을 늘릴 기회를 원천적으로 놓친다고 봐야 하죠.”

해외 사정은 어떨까. 이미 아마존 원클릭 같은 간편한 결제방식이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처럼 복잡한 사용자 인증을 요구하는 결제 기술은 아예 안 쓴다. 한 쇼핑몰이 불편한 결제 서비스를 채택하면, 사용자는 더 간단히 물건을 살 수 있는 다른 쇼핑몰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턱 없는 간편한 결제는 해외 전자결제 시장에서는 당연한 얘기가 됐다. 현재오 매니저는 “동남아시아 고객과 얘기해보면 결제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솔루션은 도입을 굉장히 꺼린다”라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입구 가로막는 한국 vs 입장시키고 검문하는 세계 시장


결제를 간편하게 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돈이 오가는 만큼 안전성도 중요하다. 한국과 해외 전자결제 시장은 어느 단계에 안전장치를 만들어뒀는지가 다르다.

한국은 사용자 바로 앞에 검문소를 세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나 돈을 주고받을 때 사용자가 스스로를 인증하도록 법으로 못박았다. 여기에 공인인증서 같은 기술이 쓰인다. 인터넷뱅킹 한번 하려면 보안 프로그램 몇 개와 바이러스 백신도 설치하라고 사용자에게 강제한다.

반면 외국에서는 진짜 결제가 일어나는 뒷단에 검문소를 세운다. 신용카드 회사와 전자결제 회사, 인터넷 상거래 회사는 고객이 보낸 결제 요청이 사기인지 아닌지를 검토해 이상한 결제 요구를 취소하는 부정사용방지 솔루션을 쓴다.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검증 업무는 사용자가 결제 단추를 누른 뒤에 처리한다.

사사건건 개입하는 한국 vs. '알아서 하고 책임지라’는 세계 시장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정부의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국은 전자결제 시장을 규제할 때 기술적인 부분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 회사가 손잡고 PCI-DSS 같은 보안 표준을 만들어 안전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외국 정부는 전자상거래 회사가 마음에 드는 결제 수단을 쓰고 안전망을 갖추도록 놔두되, 사고가 나면 엄정한 행정절차를 밟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운 벌금을 물리거나 사업권을 빼앗기도 한다. 자유를 주는 만큼 책임을 묻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등 규제기관이 '공인인증서와 동등한 안정성을 제공하는 인증수단을 써라’라고 강요하는 한국 상황과 대비된다. 정부가 전자결제 분야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모습을 구태연 태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정부가 민간 회사를 미성년 자식으로 보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결제회사 책임 강화하면 해결될 일


사용자 인증을 철저히 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국은 결제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철저히 사용자를 확인하기 때문에 사기 결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는 해외에선 꽤 큰 돈이 부정 사용으로 새 나간다. 현재오 매니저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사기 결제가 전체 매출 가운데 3% 가량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적지 않은 비중이다. 여기에 사기 결제 금액을 보상해주는 등 처리 비용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실제 피해액은 이보다 훨씬 크다.

이런 부담을 감수하고도 해외 기업이 간편한 결제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잃는 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오 매니저는 “결제가 편하다보니 아이템이 좋으면 매출이 금방 커진다”라며 “첫 결제 이후로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만으로 결제할 수 있으니 가입자 기반 사업 모델의 재판매 비율이 굉장히 높다”라고 말했다. 결제 편리성이 높은 대신 결제 사기를 걸러내는 부정사용방지 기술에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부담은 남는다.

금융 사기가 일어날 경우 사용자가 아니라 결제를 해준 회사 쪽에서 피해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해외 전자결제 회사는 정부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다양한 보완책을 마련한다. 우선 전자결제 회사는 아무 쇼핑몰에나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전에 엄정한 심사를 거친다. 외부 회계감사 보고서나 사장의 여권 사본, 실제로 온라인 사업을 벌인 몇 개월 동안 거래 내역 등을 확인한다. 서류심사에 탈락하는 회사가 전체 심사 신청 고객 가운데 30% 정도가 된다. 내수용 전자결제 회사는 피해가 국내에만 한정되기 때문에 보증보험에 가입하는 정도만 요구한다.

해외 전자결제 회사는 부정방지솔루션을 비롯해 각종 보안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이 역시 자유를 누리는 대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제 때문이다. 성장세가 지지부진한 한국 보안 시장과 달리 해외에선 보안 분야가 차세대 먹거리로 각광받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부가 민간 회사에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니 산업이 살아난다. 이동산 페이게이트 CTO는 지난 6월 세미나를 열고 “전자결제 시장을 민간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전자결제 시장도 언젠가 바뀔 것"


안전행정부가 지난 5월 공인인증서 사용을 강제하는 규제를 폐기했지만, 여전히 한국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려면 공인인증서를 써야 한다.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인증기술을 규제기관이 아직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지부진한 움직임에 지친 사업자는 스스로 발 벗고 나섰다. 몇몇 인터넷 상거래 회사는 글로벌콜렉트 같은 해외 전자결제 회사와 손잡고 국내 규제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국내 쇼핑몰에 해외 전자결제 서비스를 도입하면, 쇼핑몰 고객은 아마존 원클릭 같이 손쉽게 물건 값을 치를 수 있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자·마스터 카드와 제휴를 맺은 신용카드를 써야 하고 이 카드로 해외 결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국제결제 대금이 물건 값에 덧붙는다. 원화와 달러를 바꿀 때 환차손도 생길 수 있다. 이런 약점이 있지만, 결제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에 해외 전자결제 서비스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현재오 매니저는 “국내에도 몇 군데 사업자와 협의를 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런 우회로가 나타나도 국내 규제기관이 막을 방법은 없다. 한국 고객이 한국 카드회사를 전혀 거치지 않고, 해외 신용카드로 해외 결제회사에 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마스터카드로 아마존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현재오 매니저는 “한국 전자결제 시장도 언젠가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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