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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나 MS워드 설치하면 같이 깔리는 글꼴은 마음대로 써도 되나요?” - 윤나리(블로터닷넷)

블로터 페이스북지기 윤나리 씨가 제게 물었습니다. 전에 글꼴 관련 저작권을 정리한 기사를 썼는데도 바로 답을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라며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이 기사로 대답을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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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글꼴 파일

먼저 '글꼴'과 '글꼴 파일'의 차이를 확실히 알아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국내법은 글꼴을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1996년 ‘저작권 등록 반려 처분 취소’ 판결에서 대법원이 내린 판단을 보시죠.

“서체 도안은 그 자체가 실용적인 기능과 별도로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저작물로서 보호된다” - 대법원 1996년 8월23일 선고94누5632

글꼴 자체는 창작 행위를 위한 실용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인쇄 광고에서 예쁜 글자를 발견하고 그 글자를 사진 찍어 저장해뒀다가 인터넷에 올릴 광고를 만드는 데 쓴다고 해도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글꼴 파일은 다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보고 저작권을 인정합니다. 글꼴 파일을 복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내주면 저작권법 위반입니다.

“(글꼴 파일은) 일련의 지시, 명령에 해당하므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 대법원 2011.6.26. 선고99다50552 판결

그럼 글꼴 파일을 불법 복제해 광고나 출력용 문서를 만들면 어떨까요. 저작권법 위반일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글꼴 파일을 불법 복제했더라도, 그 글꼴로 다른 창작물을 만드는 일은 저작권 위반이 아닙니다. 글꼴 파일을 불법 복제하는 행위만 저작권을 어기는 겁니다.

법무법인이 ‘글꼴 불법으로 썼다’며 합의금 내놓으라면?…“ㄲㅈ”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법무법인이 인터넷에 올린 작업물을 보고 ‘우리 고객사 글꼴을 불법으로 썼다’며 합의금을 내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시하세요. 이건 법을 빙자한 낚시일 뿐입니다. 내 컴퓨터를 뒤져보기 전에 내가 글꼴을 사서 쓰는지 불법으로 쓰는지 법무법인은 알 길이 없습니다. 법무법인은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으로 마구잡이로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찔러대며 떠보는 겁니다. 한두명만 겁 먹고 돈을 주면 큰 수고 안 들이고도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법무법인 직원이 컴퓨터를 뒤져보겠다고 직접 사무실로 처들어오면 어떡하냐고요? 쫓아내면 됩니다. 법원에서 수색영장 받아오라고 하세요. 영장 없이 협조공문 따위를 들고 와도 여기에 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법무법인은 경찰이나 검찰 같은 법 집행 기관이 아닙니다. 법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일 뿐이죠. 제대로 절차 밟아오라고 하면 십중팔구 던졌던 낚싯대를 거둘 겁니다.

이런 마구잡이 협박이 얼마나 많았는지,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폰트 파일에 대한 저작권 바로 알기’라는 안내 문서까지 내놓았습니다.

계약한 용도를 넘어서면 손해배상할 수도

'아래아한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 '어도비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글꼴도 함께 깔립니다. 이런 글꼴을 묶음판매한다는 뜻에서 '번들'이라고 부릅니다. 엑소 브로마이드를 사면 덤으로 주는 월드콘 같은 느낌이죠. 사실 문서 작업이나 콘텐츠 창작 작업에는 글꼴을 안 쓸 수가 없으니까 치킨보다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아래아한글과 함께 깔린 글꼴이 MS워드에서도 보이고, 어도비 포토샵에서도 보이네요. 이런 글꼴을 MS워드와 포토샵에서 사용해도 될까요?

윤나리 씨가 제게 물어본 게 바로 이겁니다. 제값 주고 산 프로그램에 딸려온 번들 글꼴은 어디까지 쓸 수 있냐는 거죠.

저작권 문제와 별개로, 사용권 계약 위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남습니다. 저작권은 저작물에 관한 독점적인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 가운데 사용권이 있습니다. 사용권은 이런 겁니다. “이건 내 물건이다. 소유권은 내게 있지만 너도 이런저런 경우에는 써도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서 쓴다는 건 그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사용권을 사들이는 겁니다.

한컴, MS, 어도비는 콘텐츠 제작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직접 글꼴을 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 전문 회사가 만든 글꼴을 가져와 씁니다. 글꼴 저작권은 글꼴을 만든 제작 회사가 갖습니다. 한컴 등 프로그램 제작사는 글꼴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사용권을 사들여 프로그램과 함께 묶어 다시 팝니다. 일종의 사용권 중개상인 셈입니다.

일반적인 답부터 드리죠. 글꼴 파일을 쓰기로 한 범위를 넘어섰다면 계약 위반으로 인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 회사에 물어보니 한컴은 "안 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한국MS는 "딱히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어도비는 "맘껏 써도 된다"고 답했습니다.

아래아한글 번들 글꼴, 한글 밖에서 쓰면 사용권 위반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한컴 아래아한글부터 살펴봅시다. 올해 한컴이 내놓은 ‘한글2014’ 버전부터는 한글에 딸려온 번들 글꼴이 다른 프로그램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한글이 글꼴 파일을 자체 관리하기 때문이죠.

'한글2010'같은 예전 버전은 컴퓨터 공용 글꼴 폴더에 번들 글꼴 파일을 바로 복사해 넣습니다. 이 덕분에 사용자는 MS 워드나 어도비 포토샵에서도 한글 번들 글꼴인 HY견고딕을 쓸 수 있었죠. 하지만 다른 프로그램에서 한글 번들 글꼴을 쓰면 사용권 계약 위반이 될 수 있답니다.

김가비 한컴 과장은 “설치 과정에 약관에 동의해야만 프로그램이 깔린다”라며 “한글을 설치해서 쓴다면 모두 라이선스에 동의한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말하면 한글 번들 글꼴을 다른 프로그램에서 활용하면 사용권 위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최신판이 아닌 한글2010 이전 버전은 시스템 글꼴 폴더에 번들 글꼴을 설치합니다. 사용자는 ‘원래 있던 글꼴인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별 고민 없이 여기저기 한글 번들 글꼴을 썼습니다. '구조적으로 한컴이 글꼴 사용권 위반을 부추긴 셈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김가비 과장은 저작권 문제가 불거진 뒤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에둘러 답변했습니다.

“저작권 이슈가 불거지기 시작한 게 2011년부터라고 하더라고요. 그 전에는 이런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약관에 동의는 받았지만 기능적으로 막을 정도는 아니었던 거죠. 그러다 2011년도에 저작권 문제가 부각되니까 그때부터는 기능적인 반영으로 방향을 바꿔서 한글2014부터는 아예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용이 안 되게 한 겁니다.”

'한컴이 사용권 위반으로 사용자를 고소한 적 있냐'고 물었더니 '조사된 사례는 없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사용권을 가진 주체는 글꼴 제작사고 한컴은 글꼴 사용권을 중개 판매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글꼴 라이선스에 관한 문제는 제작사에서 직접 관리할 사안이라는 게 한컴의 입장이었습니다.

MS오피스 번들 글꼴 “유연하게 쓸 수 있다"

한국MS 윤희수 대리는 대답을 웹사이트 링크로 대신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영문 웹사이트 글꼴에 관한 안내 페이지였습니다. 여기에는 “글꼴은 MS가 공급한 제품과 같이 사용권에 제약을 받는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복제나 재배포, 역공학(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글꼴마다 사용권이 각각 다르니 혹시 다른 용도로 쓰고 싶으면 일일이 글꼴 사용권을 확인하라는 조언도 들어 있습니다. 새로울 건 없는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MS 오피스 번들 글꼴을 다른 프로그램에서 쓰는 게 사용권 위반이라는 건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윤희수 대리는 법무팀 자문을 받아 짧은 대답을 건넸습니다. “유연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MS가 뻣뻣하게 사용권 갖고 일일이 시비 걸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MS 오피스 번들 글꼴은 '유연하게' 쓰시면 되겠습니다.

어도비, "정품 프로그램 사서 쓴다면 맘껏 쓰시라"

어도비는 유서 깊은 콘텐츠 저작도구 제작회사답게 가장 시원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어도비시스템즈 홍보를 담당하는 샤우트웨거너에드스트롬 김보현 대리는 “정품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때 함께 깔린 글꼴은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맘껏 써도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나온 어도비CC(크리에이티브클라우드)부터는 글꼴 관리를 '타입킷(Typekit)’라는 별도 프로그램이 담당합니다. 어도비가 제공하는 수천개 글꼴 가운데 필요한 글꼴을 내려받아 설치하면, 같은 어도비 아이디를 쓰는 다른 컴퓨터나 태블릿PC 등에서도 그 글꼴을 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한국어도비는 "타입킷의 폰트는 데스크톱 동기화를 통해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애플 아이워크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사용 가능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제약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어도비CC는 컴퓨터 2대까지만 설치되니, 글꼴도 2대에서만 쓸 수 있는 겁니다. 프로그램과 글꼴 사용권이 함께 가는 거죠. CS6 이전 버전에 포함된 글꼴도 CS 프로그램을 설치한 컴퓨터 외에 다른 컴퓨터로 글꼴을 복제하거나 무단 배포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웹사이트에 웹폰트로 쓰는 경우는 트래픽에 따라 별도로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따로 확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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