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1일 오후, 일본이 뒤흔들렸다. 큰 지진이 일본 동북부를 때렸다. 이어 40미터가 넘는 거대한 쓰나미(지진 해일)가 해안 지역에 몰아쳤다.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도 망가뜨렸다.

할 세키 개발자는 당시 도쿄 롯본기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사무실은 24층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은 멀리 떨어진 도쿄 땅도 흔들었다. 모든 빌딩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전화선이 끊겼다. 다행히 인터넷은 작동했다. 덕분에 할 세키 씨는 가족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진에 관한 뉴스가 쏟아졌다. 메일링리스트에도 지진 소식이 가득했다. 할 세키는 위치정보 분야 전문가였다. 위치정보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술 컨설팅을 하는 회사도 세운 터였다. 그는 평소 활동하던 오픈소스 위치정보 개발 공동체 ‘오픈스트리트’ 커뮤니티에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없을까.”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 ‘우샤히디’를 언급했다. 우샤하디는 아프리카에서 재난 정보를 공유하는 위치정보 기반 정보 공유 플랫폼이다. 지진 때문에 멈춰선 지하철을 뒤로 하고 몇 시간을 걸어 집에 돌아온 할 세키는 그날부터 개발 활동을 시작했다.

'우샤히디(Ushahidi)'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스와힐리어로, ‘증언’이라는 뜻이다. 주요 언론이 케냐 내전을 보도하지 않을 때 인터넷으로 피해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크라우드소싱 플랫폼이다. 많은 사용자가 지도 위에 정보를 표시한다.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던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우샤히디를 활용한 덕에 다국적 지원단체가 보다 효율적으로 구조∙지원 활동을 펼쳤다.

할 세키 개발자는 도호쿠 지진이 일어난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가 1개월 동안 프로젝트 관리자로 나서 개발자 공동체 ‘핵포재팬’과 함께 꾸린 지진 피해 재건 정보 공유 웹사이트 ‘신사이닷인포’에는 많은 정보가 모여들었다. ‘신사이’는 일본어로 지진이라는 뜻이다. 신사이닷인포는 3년이 넘도록 재해 복구 포털사이트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포털 만들며 '시민해킹' 가능성에 눈떠

할 세키 씨는 신사이닷인포를 꾸리며 자신의 프로그램 개발 능력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핵포재팬과 손잡고 일하며 그는 개발자가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핵포재팬은 개발자 중심 조직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은 참여하기 힘들었다. 할 세키 씨는 개발 능력이 없는 일반 시민도 지역사회 문제를 풀어내는 데 힘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민 해킹' 운동을 벌이는 비영리단체 ‘코드포아메리카' 활동가인 제니퍼 팔카가 TED 무대에서 펼친 강연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2년 뒤인 2013년 그는 ‘코드포재팬(Code for Japan)’을 직접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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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에게 시민 해킹 운동을 시작할 영감을 준 TED 강연. 한글 자막도 있다.


‘시민해킹(Civic Hacking)’이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시민이 모여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지역사회 문제를 풀어내자는 사회 운동이다. ‘해킹'이라는 이름처럼 프로그래머가 주축이 된다. 개발자가 마음껏 프로그램을 뜯어보고 개선하는 해킹 문화를 사회운동에 빌려왔다. 하지만 시민 참여도 없어서는 안 된다.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와 개발자 공동체가 함께 만든 신사이닷인포도 일반 시민이 정보를 올려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할 세키 대표는 “개발자와 시민단체가 힘을 합치면 정보에서 소외된 지역 거주민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
▲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

<블로터>는 지난 9월5일 오전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를 영상 인터뷰했다. 할 세키 대표는 코드포재팬을 꾸린 가장 큰 이유가 호기심이었다고 밝혔다. “테크 피플이 일반 사람과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했어요.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만드는 데서 시작했죠. 이름이 ‘코드포재팬을 어떻게 시작할지 생각하는 콘퍼런스’였어요. 50여명 정도가 모여 토론을 했는데요. 왜 코드포재팬을 하고 싶은지, 동기는 뭔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의견을 나눴죠. 이때 들은 이야기를 모아 코드포재팬 활동 계획 초안을 짰어요.”

신사이닷인포를 만든 할 세키 대표가 코드포재팬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언론도 주목했다. 지역문제를 해결하려고 활동하던 시민활동가의 입소문도 유명세를 더했다. 1년 만에 페이스북 그룹에 1300명이 넘는 회원이 모였다. 지금 코드포재팬은 60개 지역 거점 커뮤니티를 돕고 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지역정부에 일손을 보태는 펠로십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3중고 겪은 농촌 마을을 위해 ‘코딩'하라

코드포재팬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나미에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지원하는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다. 나미에 마을은 후쿠시마 원전 옆에 있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동일본 대지진 때 지진 때문에 집 65채가 무너졌다. 뒤이은 쓰나미는 집 586채를 집어삼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나미에 마을은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나미에 마을 주민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바다와 후쿠시마 원전 사이에 위치한 나미에 마을(출처 : 코드포재팬 발표 자료)
▲ 바다와 후쿠시마 원전 사이에 위치한 나미에 마을(출처 : 코드포재팬 발표 자료)

그러나 오랫동안 나미에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나미에 마을을 버릴 수 없었다. 비록 피치못할 이유로 마을을 떠나야 했지만 마을공동체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을 재건 작업이 어떻게 진행 중인지, 이웃집 사람은 잘 사는지 알고 싶었다.

나미에 마을이 먼저 코드포재팬에 도움을 청했다. 나미에 마을은 전국 각지에 사는 주민을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미에 마을은 주민들에게 태블릿PC를 나눠주고 거기에 응용프로그램(앱)을 깔아 온라인상에 공동체를 다시 세우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프로젝트를 맡긴 나미에 마을 주민이 자신의 요구를 정확히 밝힐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작은 농촌 마을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나미에 마을에 필요한 것이 뭘까요?” 코드포재팬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시민의 해킹 운동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방식대로다. 나미에 마을 주민을 직접 찾아가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이들을 개발 행사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아이디어를 모으는 행사를 7번 열었다. 개발자를 포함해 시민 420여명이 770여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개발 행사 3번이 열리는 동안 이 가운데 14개 아이디어가 앱 형태로 구현됐다.

▲  지난 5월29일 도쿄서 열린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 아이디어 공모 현장 (출처 : 코드포나미에 웹사이트)
▲ 지난 5월29일 도쿄서 열린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 아이디어 공모 현장 (출처 : 코드포나미에 웹사이트)

올 4월 시작한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코드포재팬은 크라우드소싱 방식으로 나미에 주민에게 필요한 기능을 찾았다. 실시간으로 마을 방사능 오염 지도를 보여줘 언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을지 직접 확인케 하고 옛이웃과 소통하는 기능을 넣어 지역색을 잃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지역 뉴스와 지방 정부 소식도 알려주고 마을 사진도 공유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코드포재팬은 개발회사를 공모하는 중이다.

시민해킹 경험 나누고 한국 노하우 듣고파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는 '시빅해커(시민해킹 활동가)’가 만든 앱에 시민들이 만족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역거점 대표(브리게이드 캡틴)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거나, 그 지역 시장이 지역거점 대표에게 고맙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들을 때가 가장 자랑스러워요. 시민해킹 운동이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다는 제 믿음이 증명된 셈이니까요.”

시민해킹 운동을 하며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시민 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할 세키 대표는 “아무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그게 유용한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라며 “사람들이 우리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라고 고백했다. 개발자로서 프로그램은 뚝딱 만들어 내도 사용자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일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얘기였다. 다행히 그의 우려를 해결할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일선 지역거점 몇 곳에선 정기적으로 지역 거주민에게 코드포재팬이 내놓은 서비스를 홍보하고 사용법을 알려주는 행사를 연다. 카페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강의를 열고 태블릿PC나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할 세키 대표는 “이런 오프라인 활동이야말로 지역 거주민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할 세키 대표의 꿈은 시빅해커나 시민 경영자를 위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할 세키 대표는 일본에서 시민 활동가가 마음놓고 뜻을 펼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일구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처럼 시빅해커를 위한 협업공간(코워킹 스페이스)을 마련하고 초기 프로젝트에 자금을 댈 수 있으려면 먼저 코드포재팬이 궤도에 올라야 한다. 지속가능성은 코드포재팬을 포함한 많은 시민운동 단체가 마주하는 과제다.

HalSeki_CodeForJapan_CEO_Interview_CCKInternationalConference_03
▲ HalSeki_CodeForJapan_CEO_Interview_CCKInternationalConference_03

코드포재팬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오는 10월 코드포재팬은 일본 중앙정부와 지역정부 관계자를 초청해 시민해커 등 전문가와 어울리며 시민해킹 운동을 통해 열린 정부 활동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코드포재팬 서밋’이다. 할 세키 대표는 “일본에선 이런 콘퍼런스가 열린 적이 없다”라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라며 기대감을 밝혔다.

코드포재팬은 2015년부터 기업에 시민해커를 파견하는 '코퍼레이트 펠로십 프로젝트’도 시작한다.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에 지역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가 팔 걷고 나섰듯, 기업이 지역 정부 오픈데이터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게 코드포재팬의 개발 능력을 보태고 수익을 얻는다는 계획이다.

할 세키 코드포재팬 대표는 곧 한국도 찾는다. 9월16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에서 열리는 'CC코리아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코드포나미에 프로젝트에 얻은 영감과 노하우를 나누기 위해서다. 할 세키 대표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어떤 프로젝트가 잘 되고 있는지, 어떻게 기술전문가를 사회운동에 끌어들이는지 듣고 싶어요. 특히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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