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를 얘기하면 늘 규제에 대한 비판이 뒤따른다. '국내 규제가 과도한 탓에 그럴싸한 핀테크 기업이 나타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페이팔이나 스퀘어 같이 성공한 해외 핀테크 스타트업을 가리키며 '한국에도 이런 기업이 나오려면 하루 빨리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고 소리 높인다. 지금껏 언론도, 금융·IT 전문가 목소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규제를 걷어내는 일만이 능사일까. 유재필 금융보안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무작정 해외 사례만 좇으면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규제가 너무 많다. 불필요하다’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금융 규제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서도 페이팔이 비은행송금사업자로 등록하고 사업합니다. 미국은 각 주마다 사업 자격증을 다 따야 하죠. 한국은 감독을 강조하는 편이고, 미국은 (감독보다) 소비자 권익을 침해했는지와 애국법에 따라 테러 자금과 연관됐는지를 확인하는 게 다릅니다."

▲  유재필 금융보안연구원 정보보안본부 보안기술연구팀 책임연구원
▲ 유재필 금융보안연구원 정보보안본부 보안기술연구팀 책임연구원

오픈넷이 11월18일 저녁 서울 강남구 디캠프에서 연 ‘핀테크와 금융규제, 갈등과 전망’ 포럼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유재필 책임연구원은 나라마다 각자 규제 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핀테크가 규제 안 받고 서비스한다고들 하는데, 마그네틱 신용카드 여러장을 한 데 모아 간편하게 쓰는 ‘코인'이라는 기기는 카드 복제 우려가 있다고 미국에서도 왜 규제를 안 하냐고 지적받습니다. 각 나라마다 규제 프레임이 있습니다. 요즘은 이 규제 프레임이 안전한 서비스를 만드는 데서 사용자 편의 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규제를 걷어내는 게 아니라 규제 틀이 바뀌는 전환기라는 거죠."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역시 해외 사례와 국내 상황을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며 알리바바를 예로 들었다.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다. B2B 온라인 상거래 웹사이트 알리바바로 시작해, B2C 쇼핑몰 '타오바오'를 열었다. 또 내부 결제 시스템으로 '알리페이'를 만들어 핀테크 분야에 뛰어들었다. 알리바바는 금융 당국에 은행과 동등한 입장에서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인정받고 '위어바오'라는 펀드 상품을 팔아 6개월 만에 87조원(5천억위안, 2014년 2월 기준)이라는 거금을 끌어모았다.

알리바바가 핀테크 분야에 빨리 자리잡을 수 있던 이유는 중국 시장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중국은 신용카드 결제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알리바바는 신용카드를 이용한 전자결제 시스템을 만드는 대신 사용자가 알리바바에 현금을 적립해두고 물건값을 치르는 애스크로(제3자 보증결제) 시스템 '즈푸바오'를 만들었다.

많은 사용자가 계정에 현금을 넣어자 알리바바는 그 돈을 운용해 새로 수익을 노릴 수 있게 됐다. 알리바바는 사용자가 넣어둔 여유자금을 텐홍자산운용이 꾸린 통화펀드(MMF) 텐홍에 위탁 운용하는 상품을 개발했다. 위어바오다.

▲  알리바바가 판 MMF 상품 '위어바오' 개요도(출처 :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중국 ‘위어바오(余额宝)’의 성장배경 및 시사점' 보고서)
▲ 알리바바가 판 MMF 상품 '위어바오' 개요도(출처 :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중국 ‘위어바오(余额宝)’의 성장배경 및 시사점' 보고서)

중국은 금융당국이 시중은행 이자율을 결정하기 때문에 예금 금리가 0.35%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 위어바오는 연 5~6%에 달하는 높은 이자율을 보장해 큰 인기를 모았다.

김종현 연구위원은 “시장 상황이나 결제 방식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알리바바 같은 모델은)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라며 “핀테크라는 큰 흐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유재필 책임연구원은 한국에서 핀테크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힘든 이유로 각박한 창업 생태계를 들었다.

“ICT 스타트업 가운데 글로벌 기업이 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해외는 인수합병이 활발한데 국내는 안 된다고 합니다. 벤모가 브레인웨이브에 인수되고, 브레인웨이브는 페이팔에 인수되고, 페이팔은 이베이에 인수됐습니다. 해외는 투자 환경도 잘 돼 있고, 결제업체가 적극적으로 인수합병을 하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던 겁니다. 핀테크(가 크지 못하는 이유가) 규제 때문인 것도 사실인데, 전체적인 창업 문화도 작용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현행 규제를 개선할 필요성을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재필 책임연구원은 “보안 중심으로 짜인 국내 규제가 스타트업이 살아나기에 장벽이 되는 듯하다”라며 “규제가 정리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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