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많은 정보는 소리로 전달 받는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듣고,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접한다. 그럼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은 어떨까? 대개는 글과 수화에 의존해서 정보를 습득하기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다. 에이유디라는 기업은 청각장애인에게 좀 더 많은 정보를 주기 위해 기술의 힘을 빌렸다. 이들은 자막 공유 플랫폼 ‘쉐어타이핑’을 만들었다.

노트북 대필 제도에서 힌트 얻어

에이유디를 만든 박원진 이사장은 청각장애인이다. 그는“청각장애도 여러 단계가 있다”라며 “나에게 소리란 마치 피아노의 가운데 페달을 누른 듯이 작게 들린다”라고 설명했다. 박원진 이사장은 대신 입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챈다. 사람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면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쉐어타이핑 아이디어는 박원진 이사장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박원진 이사장이 대학생이던 시절 그는 ‘노트북 대필 제도’를 이용했다. 노트북 대필 제도란 대학에서 청각 장애인을 위해 강의에서 진행되고 있는 말을 노트북으로 적어서 보여주는 일을 뜻한다. 보통 근로장학생이나 자원봉사학점이 필요한 학생들이 노트북 대필 제도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제가 대학시절 때의 노트북은 굉장히 무거웠어요. 휴대하기 많이 불편했죠. 노트북 대필 제도를 이용하려면 제가 앉고 싶은 자리에 못 앉겠더라고요. 절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은 원하는 자리가 따로 있거나 친구들과 함께 앉고 싶어했거든요. 옆에 앉는다 치더라도 고개를 계속 돌려서 봐야 하니 자세도 불편했어요. 결국 나중엔 노트북 대필 제도를 이용하지 않았죠. 그냥 교실 맨 앞 책상에서 수업을 듣는 게 나았어요.”

▲  박원진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왼쪽)과 선대석 인턴
▲ 박원진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왼쪽)과 선대석 인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마트폰을 접했다. 박원진 이사장은 노트북 대필 제도를 떠올리며 스마트폰으로 더 많은 사람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이핑하는 사람과 청각장애인이 함께 있지 않아도 되는데다, 스마트폰은 가볍고 이동성이 좋기 때문이다.

특수교사에서 IT 기업 창업가로

박원진 이사장이 처음부터 창업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의 꿈은 청각장애인이 세상으로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장애인을 돕는 특수교사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사립학교에서 일했고, 2012년에 공립학교로 옮기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헌데, 공부만 계속 하다보니 왠지 심심하고 다른 일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셜 벤처 경연대회’ 포스터를 보게 됐고, 쉐어타이핑이라는 아이디어로 대회에 참가했다.

“어차피 임용고시 준비 중이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경연대회에 참가했어요. 붙을 거라고 예상은 못했는데 우수상을 받았죠. 그 대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이후에 정부가 진행하는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에도 선정됐습니다. 정몽구재단이 주최하는 ‘H-온드림’ 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고요. 지금은 아스피린센터라는 벤처지원센터에 입주해 있어요.”

▲  쉐어타이핑 구조(사진 : 에이유디 페이스북 계정)
▲ 쉐어타이핑 구조(사진 : 에이유디 페이스북 계정)

박원진 이사장은 “쉐어타이핑의 프로토타입을 기술로 구축하는 데는 3개월 정도 걸렸다”라며 “이후 기능을 안정화하고 성능을 높이는 데 1년 이상 투자했다”라고 설명했다. 에이유디는 개발인력이 없기 때문에, 행복한웹앤미디어라는 개발업체와 협력을 맺고 기술을 만들었다.

쉐어타이핑의 핵심 경쟁력은 속도이다. 구글독스 같은 협업 문서를 보자. 일반 데스크톱 문서도구를 비교하면 구글독스가 글씨가 입력되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쉐어타이핑은 사람 말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정보를 입력할 수 있도록 지연 현상을 최대한 없앴다.

“쉐어타이핑은 1초마다 새로운 데이터를 갱신해요. 엔터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다보니 초창기에는 10분만 사용해도 멈추었죠. 처리해야 하는 용량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거기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면 다시 멈췄고요. 지금은 성능이 높아졌어요. 여러 사람이 몇 시간 이용해도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 천명 아니 사람 수의 제한 없이 동시 접속해도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도록 기술을 다듬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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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어타이핑 데모 영상 보기(유튜브)


공익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은 주식회사와 비영리단체의 중간쯤에 있는 비영리 조합법인이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일반 협동조합과 개념이 다르다. 사회적협동조합은 단순히 사람을 모아서 신고해서 시작할 수 없다. 반드시 정부기관의 허락을 받아야만 운영할 수 있다. 또 반드시 사업의 40% 이상을 공익 활동에 기여해야 한다. 배당도 금지돼 있다. 협동조합법이 개정되면서 2013년 초부터 사회적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에이유디는 2014년에 사회적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했다.

▲  사회적협동조합은 공익 사업을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사진 : 협동조합 홈페이지)
▲ 사회적협동조합은 공익 사업을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사진 : 협동조합 홈페이지)

“한 사람이 중심인 주식회사보다 모두에게 평등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게 좋았어요. 공익 사업을 하면서 수익을 만들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아직 국내에 사회적협동조합이 많지 않아요. 에이유디가 앞장서서 좋은 선례를 만들려고 합니다.”

에이유디는 현재 5종류의 조합원으로 이뤄지고 있다. 소비자 조합원, 직원 조합원, 생산자 조합원, 후원자 조합원, 자원봉사자 조합원이다. 소비자 조합원은 청각장애인처럼 쉐어타이핑을 쓰는 사람들이며, 생산자 조합원은 기술을 만들거나 개발자, 문자통역사 자격증을 둔 사람을 뜻한다. 자격증이 없어도 타이핑을 대신 해주는 사람은 자원봉사자 조합원에 속한다.

앞으로 에이유디의 목표는 더 많은 조합원을 모으고, 영향력이 있는 조합법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에이유디 조합원은 현재 6명. 출자금(가입비) 1만원 이상 내면 누구나 에이유디 조합원이 될 수 있다. 만약 개발자가 에이유디의 생산자 조합원으로 들어오면 에이유디 가지고 있는 서버나 스토리지 자원을 이용해서 원하는 기술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공익적인 성격이 강한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쉐어타이핑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쉐어타이핑에 가입을 해서 웹 페이지에서 타이핑하면 관련 내용을 모바일 기기로 공유할 수 있다. 에이유디는 “외부 강의는 강연자의 허락을 맡아서 메모하는 것이 좋다”라고 설명했다. 에이유디는 행사 종류에 따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에이유디는 기업 제휴나 전문 문자통역사 파견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얻어갈 심산이다. 예를 들어 한 대기업에서 신입직원 교육을 진행하는데, 직원 중 한 명이 청각장애인이라면 어떡해야 할까. 그를 위한 교육만 따로 제공하는 것보다는 쉐어타이핑을 이용하는 게 낫다. 에이유디에 있는 문자통역사가 교육 장소에 나가 발표 자료를 글로 받아 적고, 청각장애인은 쉐어타이핑에서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신입사원과 한자리에서 함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좋다.

▲  전문 문자통역사가 사용하는 키보드. 글자 배열이 조금 다르다. 문자통역사용 키보드는 버튼을 누를때 글자가 입력되지 않고 버튼을 누르고 손가락을 뗄때 글자를 입력한다. 받침 있는 글자를 좀 더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사진 : 에이유디)
▲ 전문 문자통역사가 사용하는 키보드. 글자 배열이 조금 다르다. 문자통역사용 키보드는 버튼을 누를때 글자가 입력되지 않고 버튼을 누르고 손가락을 뗄때 글자를 입력한다. 받침 있는 글자를 좀 더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사진 : 에이유디)

기관이나 기업은 에이유디 서비스를 1시간에 6~8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청각장애인 개인도 유료로 쉐어타이핑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3만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현장 컨설팅을 제공하거나 문자통역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에이유디는 이러한 서비스로 청각장애인 스스로 공청회나 토론회 같은 곳에 참여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관이든 개인이든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으면 10~20% 정도 더 저렴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현장 환경이나 규모에 따라 서비스 이용료가 다른 만큼, 정확한 이용료는 에이유디에 직접 문의하는 게 좋다.

▲  3월16일 청각장애인을 위한 디자인 강의가 열렸다. 이때 쉐어타이핑을 통해 강연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다.
▲ 3월16일 청각장애인을 위한 디자인 강의가 열렸다. 이때 쉐어타이핑을 통해 강연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모두를 위한 설계 ‘유니버셜 디자인’

에이유디는 쉐어타이핑을 단순히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 유니버설 디자인(보편적 설계) 철학이 담긴 기술이라고 말한다. 회사 이름인 에이유디(Auditory Universal Design) 자체가 ‘청각의 보편적 설계’라는 뜻이다.

유니버셜 디자인은 장애 유무나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 건축, 서비스 등의 설계를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생각해보면 쉽다. 엘리베이터는 노약자나 장애인만을 위해서 나온 기술이 아니다.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장애인이자 노약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활용할 뿐이다.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올 때 빛이 반짝거리는 것, 스마트워치에 알람을 진동으로 제공하는 것도 유니버셜 디자인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청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면서 모두가 이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쉐어타이핑에서 공유한 내용은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기술이 아니다. 모두가 기록용으로 함께 쓸 수 있다. (사진 : 쉐어타이핑 홈페이지)
▲ 쉐어타이핑에서 공유한 내용은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기술이 아니다. 모두가 기록용으로 함께 쓸 수 있다. (사진 : 쉐어타이핑 홈페이지)

쉐어타이핑은 청각장애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유용하다. 영어로 진행되는 컨퍼런스를 생각보자. 너무 빨리 지나가는 번역 내용 때문에 컨퍼런스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있지 않았는가? 이 때 전문 속기사가 번역 내용을 그대로 글로 작성하면 어떨까. 사람들은 빠르게 진행된 번역 내용을 글로 볼 수 있고, 해당 강의 내용을 글로 정리해 소지해도 된다. 서기나 메모를 대신해주는 사람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청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난청 환자, 어르신 등에게도 유용하다. 에이유디는 단순히 청각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모두가 쓸 수 있는 기술로 쓰임새를 높이고 수익모델을 확장할 생각이다.

에이유디는 최근엔 구글글래스나 음성인식같은 기술에도 관심이 많다. 박원진 이사장은 “소통은 얼굴을 보면서 하는 게 가장 좋다”라며 “구글글래스를 이용하면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소리를 문자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아직 청각장애인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좁은 편이에요. 디자이너, 바리스타 같은 일을 많이 맡고 있는데요. 저는 청각장애인에게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싶어요. 세상에 더 많이 나올 수 있게요. 과거에 교실에서 청각장애인을 도우려고 했다면, 지금은 기술로 돕는 셈이죠.”

▲  박원진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 박원진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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