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소비’라는 말이 있다. 상품을 구매할 때 가격과 품질뿐 아니라 환경 문제나 공정무역,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까지 고려하자는 얘기다.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물건을 사서 써야 한다. 소비는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어차피 살기 위해 소비해야 한다면, 주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착한 상품을 사서 씀으로써 사회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자는 게 윤리적 소비다.
윤리적 소비는 2000년대 들어 많은 부작용을 낳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제3세계 커피 농장에서 제값을 주고 사온 원두를 쓴 커피를 사먹자는 공정무역 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취지는 좋다. 그런데 실천하긴 녹록잖다. 친환경적이고 인간적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세상에 이바지하자는 뜻에 공감하더라도 수많은 상품 중에 ‘착한 제품'을 골라 쓰기란 어렵다. 깨알 같이 적힌 식품첨가물 이름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란 녹록지 않다. 가전제품은 더하다. 그저 제조회사가 TV 광고에 ‘우리 제품은 친환경’이라고 떠드니 ‘그런가보다’하고 그 회사 제품이라도 찾아쓸 수밖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곳이 있다. 독일에 터 잡은 스타트업 위그린이다. 위그린은 e쇼핑몰에서 팔리는 소비재 상품이 얼마나 착한지 평가해 사용자에게 알려준다. 착한 제품에는 녹색불을 켜고, 나쁜 영향을 많이 미치는 제품에는 빨간불을 보여주는 식이다. 어중간한 제품에는 노란불을 보여준다. 신호등처럼 직관적으로 제품의 윤리성 지표를 표시해 주기 때문에 사용자는 간편하게 착한 제품을 솎아볼 수 있다. 평가 결과는 '위그린 지속가능성 발자국'이라고 부른다.
학사 졸업 논문, 사회적기업으로 싹트다
“회사를 세울 생각은 없었어요.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해보고 싶은 생각 뿐이었죠."
위그린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모리스 슈탄초스는 애초에 회사를 차릴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찾은 그를 5월11일 오후 서울 합정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독일 베를린경제∙법학대(BSEL)에서 경영, CSR, 마케팅 등을 공부했다. 특히 소비자 행동 연구와 지속가능성 측정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을 앞둔 2010년 세계적으로 지속가능경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LOHAS 같은 지속가능성 지표가 부각됐다. 모리스가 평소에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 구체화됐다.
“전공 공부를 하다보니 이미 세상에 CSR 관련 데이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보는 연결돼 있지 않았죠. 그래서 데이터를 가져다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 사용자에게 제공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모리스는 학부 졸업 논문으로 여러 곳에 흩어진 기업 CSR 자료를 모바일 바코드 스캔 앱을 통해 한곳에 모아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시점에 보여주는 방법을 제안했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는 로직도 만들었다. 위그린이라는 사회적 스타트업이 싹튼 순간이다.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대학교에서 업무 공간과 장비를 지원 받았다. 유럽연합(EU)에서 대학을 통해 전한 장학금은 위그린을 꾸리는 마중물이 됐다. 연구를 마치고 위그린 웹사이트를 열었다. 2011년이었다. 독일 언론에서 앞다퉈 위그린을 보도했다. 모리스는 자기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회사를 차릴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내놓고보니 꽤 성공적이었어요. 언론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고요. 애초에 사업을 할 의도가 없었으니 사업 계획이나 수익 모델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계속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빅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으로 산재한 CSR 자료 한데 모아
모리스 슈탄초스 CEO의 발상은 간명했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자연스레 변화가 따라오리라는 것이다.
구심점 없이 흩어진 CSR 관련 자료를 일일이 한 곳에 모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위그린은 이런 작업을 실현하기 위해 비영리단체(NGO)나 인증기관 등 400여개 조직과 손잡았다. 이들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 자료를 만들어 온 터였다. 제품마다 1천개가 넘는 데이터가 모였다.
조직마다 평가 방식이 제멋대로여서 들쭉날쭉한 수치를 취합하는 과제가 생겼다. 위그린은 이들이 모은 정보를 여덟 갈래로 분류했다. 환경 오염,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근로 조건, 사회 기여도, 투명성, 평판, 건강에 미치는 영향, 경제적 자립도 등이다.
이렇게 분류한 데이터에 제품을 평가한 조직별로 가중치를 부여했다. 평가 자료를 만든 곳의 신뢰성, 전문성과 더불어 데이터의 접근성, 시의성, 평가 데이터의 질과 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유니세프처럼 주기적으로 대량의 데이터를 직접 조사해 공개한다면 이들이 제공한 데이터에 높은 가중치를 부과하고, 반대로 PR회사가 홍보 목적으로 낸 부실한 데이터는 가중치를 낮춰 총점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식이다. 같은 방식으로 각 제품뿐 아니라 한 회사 전체도 평가한다.
올해로 7년째를 맞는 지속가능성 평가 알고리즘은 이제 스스로 작동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위그린 안에는 따로 조사팀이 없다. 데이터는 외부 평가 조직에서 받아온다. 대신 위그린 팀원 7명은 협력 기관을 선정하고 검증한다. 이들이 제공한 데이터에 가중치를 얼마나 부과할지 결정하고 알고리즘에 접목하는 것도 사람이 할 일이다. 7명으로 충분하냐는 질문에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충분하다(good enough)”라고 답했다.
“사람이 더 많으면 더 많은 정보를 커버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많은 기업이 우리한테 항의했지만 아무도 수치를 고치지는 못했어요.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웃음). 사실 큰 회사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싫어해요. 우리가 그들이 원치 않는 투명성을 만드니까요."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위그린 팀원이 7명이라고 잘라 말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협력사 400곳에서 일하는 이들도 모두 위그린의 일을 거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we) 모두가 위그린(WeGreen)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그린은 7명이 일하는 위그린이라는 회사보다 더 큰 거죠. 독일 최대 통신사 이사진 가운데 한 명이 우리한테 무료로 멘토링을 제공하기도 해요."
투명성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위그린은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를 활용해 직접 e쇼핑몰을 차렸다. 직접 물건을 팔지는 않는다. 가격비교 서비스처럼 2천여개 소비재를 보여준다. 세계 최대 친환경 e쇼핑몰이다. 위그린 e쇼핑몰은 가격 대신 상품의 지속가능성 정보를 비교한다. 점수가 낮은 제품을 보면, 비슷한 가격이지만 더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검색하듯 간편하게 친환경 상품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모리스 CEO는 “얻기 힘든 정보를 쉽게 가져와 쉽게 빠르게 올바른 구매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라고 설명했다.
윤리적 소비에 관심있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두손 들고 환영할 소식이지만, 제조업체 쪽에서는 달갑지 않은 반응이다.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네슬레와 페레로 등 글로벌 제조사에서 항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페레로 그룹은 미켈라 페레로 CEO까지 나서 모리스 CEO를 직접 만났다. 그와 동행한 홍보 임원이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며 모리스 CEO를 회유하려 시도했다. 모리스는 “단칼에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그 뒤로 업체에서 연락 와도 아무도 안 만나요. 우리가 제조사와 직접 관계를 맺는 게 없거든요. 만나봤자 시간만 낭비하게 되더라고요."
‘뒷거래’에 실패한 페레로 그룹은 결국 정공법을 택했다. 더 친환경적인 제조법을 도입해 원래 빨간불이었던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를 노란색으로 개선했다. 극적으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긍정적인 변화임은 분명하다.
“많은 기업이 돈을 퍼부어서 가짜 명성을 쌓고 권력을 더 불투명하게 만들어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속이죠. 하지만 이들은 통제력을 잃어갑니다. 숙박업계는 달가워하지 않지만, 온라인 호텔 평가 서비스를 쓰는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시장이 더 투명해 졌죠. 아담 스미스가 말한 완전경쟁시장이 도래하는 겁니다. 오래된 회사의 나이 든 임원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런 추세는 더 확산될 겁니다. 위그린이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일입니다. 투명성은 지속가능성뿐 아니라 가격이나 품질 모든 면에 적용되는 얘기니까요."
5명 중 4명은 지속가능성에 관심 보여
위그린은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를 외부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API를 제공한다. 위그린 API를 가장 성공적으로 접목한 곳은 유럽 앱 개발사 바르쿠다. 바르쿠는 1천만 사용자가 쓰는 모바일 상품 정보 앱을 만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스마트폰으로 상품 바코드를 사진 찍으면 어디서 제일 싸게 살 수 있는지, 어떤 영양소가 있는지 나타난다. 그 속에 신호등 형태로 위그린 지속가능성 발자국도 들어갔다. 독일 정부 기관인 비즈니스 지속가능성 위원회와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형 e쇼핑몰 계열사도 위그린 API를 채택했다.
처음에 지속가능성 지수에 관심 보이는 소비자는 적었다. 바르쿠 상품 스캔 앱 사용자 5명 중 1명 정도만 위그린에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사용자 81%가 위그린 지속가능성 발자국을 눌러본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지난 4년간 변화를 정리한 연구 결과를 지난해 10월 발표했다.
“5명 중 4명이 보는 건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기업이 이런 사실을 알면 큰 세일즈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천만명 가운데 800만명이 자기 제품이 친환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는 얘기거든요. 당연히 대안을 모색할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업에 평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대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일을 하는 거죠."
적지 않은 영향을 발휘하는 만큼 위그린은 스스로도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출장 다닐 땐 비행기보다 기차를 타고, 지속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은행 계좌를 쓴다. 평가 알고리즘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은 공개한다. 스스로 떳떳해야 이런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게 모리스 CEO의 지론이다.
사회적기업, 좋은 일 한다고 끝 아냐
위그린은 사회적 영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이라고 좋은 일만 해서는 안 된다고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꼬집었다.
“사회적기업이라는 용어는 생긴지 얼마 안 된 말이에요. NGO가 하던 일이 사회적기업이 됐죠. 문제는 사회적기업이 좋은 일을 한다는 데 매몰돼 경영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겁니다. 돈을 못 벌고, 조직 운영도 못하고, 성과 측정도 못하죠. 사회적기업도 장기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속가능해야 합니다. 저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는 다른 조직이 아니라 인터넷 기업과 비교합니다."
이런 고민 덕분에 위그린은 자체적으로 지속가능한 수익 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위그린 e쇼핑몰을 통해 물건을 사면 매출에서 평균 8% 정도를 수수료로 받는다. 판매 금액의 30%까지 수수료를 주는 친환경 e쇼핑몰도 있다. 가격 비교 서비스와 같은 수익모델이다. 두 번째 수익모델은 API 생태계다. 오픈API보다 더 정교한 데이터를 이용하려는 조직과 계약을 맺는다. 정부에는 공짜로 제공하지만 e쇼핑몰 같은 곳에는 소정의 비용을 받으려 한다고 모리스 CEO는 설명했다.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오는 5월13·14일 이틀 저녁에 서울 강남구 하이브아레나에서 사회적기업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강연을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지속가능성 문제에 눈뜰 때까지
물론 위그린의 최우선 목표는 더 많은 사용자가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를 이용해 쉽고 간편하게 윤리적 소비를 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고 위그린은 웹브라우저 크롬 확장프로그램을 만드는 중이다. 위그린 쇼핑 확장기능을 설치하면, 위그린과 제휴를 맺지 않은 e쇼핑몰에도 위그린 지속가능성 발자국 지수가 나타난다. 위그린은 크롬 확장프로그램 제작비를 7만5천유로(9260만원)를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으는 중이다. 독일 e쇼핑몰 3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시험판 프로그램은 크롬 웹스토어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t=82&v=lpCEvjcF7ew
▲위그린 쇼핑 애드온 크라우드펀딩 홍보 영상 (유튜브)
모리스 슈탄초스 CEO는 더 많은 사용자를 만나기 위해 글로벌 무대로 뻗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봐요. e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과 친환경 제품에 관심 있는 사람의 교집합이 우리 시장이에요. 크지 않죠. 자라기는 하지만 성장 속도가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빠르지 않아요. 그러니 국제 무대로 나설 수밖에 없죠. 친환경 제품에 관심 있는 사람, 그 중에서 적극적이지 않아도 같은 가격이라면 착한 제품을 사겠다는 소비자가 우리가 찾는 사람입니다. 바르쿠 스캔 앱도 가격 비교 앱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다른 정보도 알고 싶어하잖아요. 그렇게 영리한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