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가을 이벤트가 끝났다. 뜬금없지만, 애플이 제품 발표를 할 때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떠나던 여름철 수련회가 떠오른다. 수련회 마지막 날 밤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풍경 말이다. 애플이 제품 발표회를 하는 새벽, 한국에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운다. 애플이 전세계로 쏘는 생중계 영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파로 갈려 이렇게 말한다. “셧업앤텍마머니(Shut up, and take my money)”, 혹은 “혁신은 없다”. 애플이 발표한 이번 제품 역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아이패드 프로'가 그렇다. 태블릿PC 시장의 미래를 이끌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목소리와 우려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 어쩌면, 아이패드 프로 속에는 모바일 기기 시대를 견뎌야 하는 IT 제조업체 모두의 고민이 한데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apple_1_800
▲ apple_1_800

“태블릿PC를 업무에...” 애플의 의지

이번 발표에 등장한 제품 중 가장 작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애플펜슬'이다. 애플펜슬은 함께 발표된 12.9인치짜리 ‘아이패드 프로’와 함께 동작한다. '갤럭시노트'의 'S펜'이 갤럭시노트와 한몸인 것처럼, 애플펜슬은 태블릿PC를 생산성 영역으로 잡아당기려는 애플의 해법이다.

애플이 지난 2011년 처음으로 1세대 아이패드를 소개한 이후 4년여가 흘렀다. 그동안 태블릿PC 시장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후발주자인 안드로이드 모바일 기기 제조업체가 너도나도 비슷한 크기의 제품을 내며 시장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래프는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용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화면이 큰 태블릿PC에 더이상 흥미를 갖지 않았다. 2013년부터 관측된 일이다. 애플도 ‘아이패드 미니’ 등으로 화면 크기를 바꿔가며 아이패드 시리즈의 재도약을 꾀했지만, 성적표는 아쉬웠다. 애플의 매출 중에서 아이패드 부문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태블릿PC가 생산적인 제품과는 거리가 먼 기기라는 점이 첫 번째 이유고, 사용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이미 디지털 소비생활의 대부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까닭으로 풀이된다. 태블릿PC의 활용처가 마땅하지 않다는 분석이 보통이다.

아이패드 프로의 의미는 애플이 태블릿PC를 완전한 생산용 도구로 업그레이드 하려는 데 있다. 특히, 애플펜슬이 소비에 최적화된 태블릿PC를 생산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도와 누르는 힘 모두를 인식하는 애플펜슬 덕분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아이패드 프로에서 마치 진짜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착각을 경험할 수도 있다. 애플이 애플펜슬을 지나치게 작거나 가늘게 설계하는 대신 실제 연필과 비슷한 두께와 길이로 디자인한 것도 이 같은 경험을 주려는 목적에서다.

과거 스티브 잡스가 스타일러스는 필요 없다는 발언을 할 때와 비교해 기술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정밀한 필압감지 기술이나 각도를 계산해 선의 두께를 표현하는 것 등 감압식이 아닌 오늘날의 터치식 디스플레이에서도 가능해졌다. 종이와 비슷한 필기 경험을 줄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 시리즈를 통해 이를 가장 먼저 경험했다면,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를 통해 적당한 시기를 잡았다.

애플펜슬 뿐 아니다. 애플은 내친김에 아이패드 프로 전용 키보드까지 내놨다. 커버로도 쓸 수 있는 ‘스마트 키보드’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서피스’ 태블릿 시리즈와 함께 내놓은 키보드형 커버 ‘타이프커버’를 떠올리면 쉽다. 아이패드 프로 옆면에 스마트 키보드 연결을 위한 스마트 커넥터까지 마련했으니 공을 들인 액세서리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스마트 키보드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가능성이 높다.

애플펜슬에서 스마트 키보드까지, 12.9인치로 기존 아이패드(9.7인치) 시리즈와 비교해 아이패드 프로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바로 생산이 가능한 태블릿PC다. 둔탁한 손가락으로, 그것도 한 화면에 하나의 앱만 띄울 수 있는 아이패드 대신 키보드에 멀티태스킹, 필요하면 스타일러스까지 지원하는 아이패드로 업무를 보라는 것이 아이패드 프로에 담은 애플의 주문이다.

덕분에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됐다. 애플의 제품발표 중간 MS 오피스 부문 부사장인 커크 코닉스바우어가 깜짝 등장한 것이다. "생산성에 관해 잘 아는 이들이 MS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필 쉴러 애플 부사장의 등 뒤로 MS의 로고가 나타나자 객석의 웅성거림이 생중계 마이크에까지 닿았다. 필 쉴러 부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객석을 향해 한 번 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이 친구들이 생산성에 대해 전문가죠.”

커크 코닉스바우어 MS 부사장은 MS 내부에서 오피스 부문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무대로 올라온 커크 코닉스바우어는 지금까지 애플 발표회를 거쳐 간 수많은 다른 업체 발표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펜슬을 손에 쥐고 제품을 시연했다. 커크 코닉스바우어와 그의 보조 발표자가 시연한 앱은 아이패드용 ‘MS 오피스 시리즈’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애플펜슬과 아이패드 프로의 새 기능인 멀티태스킹, 그리고 워드, 파워포인트, 엑셀을 모두 보여주고 무대를 내려갔다.

앞으로 IT 업체의 키노트 역사에서 퍽 오래 기억될 이 장면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애플 처지에서는 생산성 소프트웨어를 대표하는 MS 오피스 시리즈를 이용해 아이패드 프로의 생산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MS 입장에서는 다른 업체의 플랫폼을 지원하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음을 어필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MS는 새 CEO가 경영을 시작한 이후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등 다른 플랫폼 지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  '이 친구들이 생산성 전문가죠.'
▲ "이 친구들이 생산성 전문가죠."

▲  '애플펜슬'과 '스마트 키보드'
▲ '애플펜슬'과 '스마트 키보드'

애플의 '생산성 강조' 전략, 과연 통할까

여기까지는 애플의 생각이다. 문제는 사용자와 기업 등 생산주체들도 이 같은 애플의 주장을 잘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애플의 의지와 달리 물음표는 여전하다.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떠올려보자. 사용자는 익숙한 키보드와 마우스로 소프트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를 오간다. 노트북이 있는 곳이 곧 사무실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아이패드 프로는 한발짝도 더 나가자지 못했다. 스마트 키보드로 키보드를 대신할 수 있도록 했지만, 당연히 기존 키보드와 비교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마우스 대신 손가락과 스타일러스까지 쓸 수 있도록 했지만, 이 역시 높은 생산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적어도 아이패드 프로에는 맥북에어나 다른 가벼운 노트북을 대체할만한 특징이 결여돼 있다. 키보드와 스타일러스를 쓸 수 있는 반쪽짜리 노트북에 불과하다. 어중간한 생산성에 기존 태블릿PC보다는 더 커서 좀 더 불편해진, '낀 제품’이 된 셈이다. 이 같은 평가는 영국의 디자인 전문 매체 <디지털아트온라인>이 MS의 ‘서피스프로3’와 아이패드 프로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필 쉴러는 아이패드 프로의 성능이 ‘데스크톱 수준'이라고 말했고, 그래픽 처리 성능도 콘솔 게임기보다 높다고 주장했다(중략) 하지만 태블릿 PC가 다른 데스크톱이나 태블릿 PC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디자이너나 아티스트, 편집자들에게까지도 충분히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난해 ‘서피스프로3’를 리뷰하며 ‘프리미어 프로’로 동영상을 편집하고, ‘포토샵’과 ‘라이트룸’으로 사진을 보정하고, 심지어 ‘인디자인'으로 인쇄 기반 편집물을 편집했을 때, iOS용 앱으로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었다. (iOS용 앱은)스토리 보드를 짤 수 있고, 작업을 수정할 수 있으며, 거칠게 스케치를 하기에 충분하지만, 그 어떤 작업도 완료할 수는 없다.”

새 제품의 개선된 생산성을 강조하려는 애플을 위해 기꺼이 무대에 오른 이들은 MS 뿐만이 아니다. 어도비도 아이패드 프로를 손에 쥐고 어도비가 내놓은 생산성 앱을 시연했다. 엉성한 잡지의 레이아웃 한 페이지를 선보이고 내려갔다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rel]이날 어도비가 시연한 앱은 어도비의 모바일기기용 앱이다. '어도비 콤(Comp) CC’와 ‘어도비 포토샵 픽스’, ‘어도비 포토샵 스케치’다. 모두 아이패드 프로에서 쓸 수 있는 모바일 기기용 앱으로, 간단히 레이아웃을 정하거나 단순한 스케치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다. 하지만 실제 편집인이나 디자이너의 작업 환경은 이와 거리가 멀다. 수백장에 이르는 레이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성능을 내는 컴퓨터는 필수다. 미려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100여만원이 넘는 ‘와콤 태블릿’을 기본으로 갖추는 이들도 많다. 아이패드 프로와 아이패드 프로에서 쓸 수 있는 디자이너를 위한 앱은 그저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도비도 공식 블로그에서 간단한 작업은 아이패드 프로로 하되, 데스크톱에서 작업을 마무리하라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아이패드 프로가 갖는 생산성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일반 사무 환경에서도 아이패드 프로의 위치가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아이패드 프로에 애플이 처음으로 적용한 멀티태스킹 기능은 PC나 맥에 비하면 초라하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도 한두 시간 PC 앞에 앉아 있으면, 금방 수십 개가 넘는 웹브라우저 탭과 마주해야 한다. 웹브라우저를 하나만 띄우는 날은 일이 별로 없는 날이다. 보통은 몇 개의 모니터를 한꺼번에 연결해 쓰기도 하고, 웹브라우저는 몇 개나 바탕화면을 떠돈다. 아이패드 프로는 애플의 기대와 달리 그리 생산적인 제품으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애플이 아이패드 프로로 태블릿PC를 생산의 영역에 안착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생산은 아닐 것이다.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머신’은 따로 갖고 있는 이들이 간단한 작업만 빠르게 하도록 돕는 보조수단에 머무는 것이 앞으로 아이패드 프로의 위치인 것은 아닐까. 단지 생산성 기기의 보조 도구에 머물 뿐이라면, 130만원짜리 태블릿PC에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