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블릿PC 시장과 ‘시지프스 신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끊임없이 굴러떨어진다는 점이다. 시지프스는 신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굴러 떨어뜨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형벌을 받는다. 제조사들은 계속해서 태블릿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전세계 태블릿PC 시장은 2014년 정점을 찍고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패드 프로 사진
▲ 아이패드 프로 사진

올해 1분기를 기준으로 태블릿PC 시장 성장률은 10분기 연속으로 줄었다. 아이패드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정점을 찍은 아이패드 판매량은 지난해 반토막이 났다.

▲ 시지프스의 바위는 간신히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진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 시지프스의 바위는 간신히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진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태블릿PC 시장이 시지프스의 바위가 된 건 소비자를 기만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들은 화면 크기만 스마트폰보다 크면 새로운 사용성이 담보될 것처럼 굴었다. 화면만 큰 스마트폰 형태의 태블릿PC는 5인치 이상의 대화면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자 자연스레 외면받았다.

‘아이패드 프로’는 영원히 고통받는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2015년 등장한 아이패드 프로는 이른바 ‘생산성 도구’를 표방하며 스타일러스 펜과 키보드와 함께 출시됐다.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아이패드 프로는 태블릿에 생산성이라는 새로운 사용성을 부여하는 ‘굳히기 작업’이다.

10.5형 크기에 담긴 애플의 고민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는 10.5형과 12.9형 두 크기의 모델로 출시됐다. 기존 9.7형이 10.5형 모델로 대체된 셈이다. 여기에는 아이패드 제품군에 대한 애플의 고민이 담겨 있다.

▲  ‘아이패드 5세대(9.7형)’와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10.5형)’
▲ ‘아이패드 5세대(9.7형)’와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10.5형)’

이번 아이패드 프로를 발표하기에 앞서 애플은 지난 3월 아이패드 5세대를 시장에 선보이며 복잡하게 분화된 제품군을 아이패드와 아이패드 프로로 단순화했다. (물론 7.9형 미니가 아직 남아있긴 하다.) 가격도 최저 40만원대로 낮춰, 대중성을 중시한 모델로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성장이 멈춘 아이패드에 대한 투트랙 처방이다. 가격을 낮춰 아이패드 경험을 넓히고 더 나은 생산성이 필요한 사용자에게는 아이패드 프로를 내미는 전략이다. 화면 크기의 차별화는 이런 투트랙 전략과 맞물려 있다.

대중적인 모델과 전문가용 모델로 라인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9.7형의 화면 크기는 둘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대중적으로 익숙한 9.7형은 ‘가성비’ 아이패드로 남겨두고 아이패드 프로는 10.5형의 새로운 크기를 택해 외형적으로 구분이 쉽게 되도록 했다. 또 생산성 도구로서 9.7형의 화면은 부족하다는 생각도 반영됐다.

▲  나의 아이패드 5세대는 오징어가 돼버렸다.
▲ 나의 아이패드 5세대는 오징어가 돼버렸다.

실제로 사용해 본 10.5형의 아이패드는 기존 9.7형보다 화면을 20% 늘려 문서나 그래픽 작업 시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무게나 부피가 크게 는 것도 아니다. 최근 ‘베젤리스’ 추세에 맞게 베젤 크기를 최소화해 9.7형의 휴대성을 유지했다. 제품 표면적은 7%밖에 늘지 않았다. 베젤을 줄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터치 오작동도 ‘팜 리젝션’ 기능을 통해 막았다.

▲  두께도 아이패드 5세대에 비해 아이패드 프로가 더 얇다. 아이패드 5세대의 비교 우위는 가격과 ‘카툭튀’가 없다는 점이다.
▲ 두께도 아이패드 5세대에 비해 아이패드 프로가 더 얇다. 아이패드 5세대의 비교 우위는 가격과 ‘카툭튀’가 없다는 점이다.

생산성을 담보하는 지구 최고 디스플레이



“적어도 지구에서는 최고의 디스플레이”



애플이 내세우는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의 특장점 중 하나는 디스플레이다. 기존 9.7형 아이패드 프로도 주변 빛에 맞춰 자동으로 화면 색온도를 눈에 편하도록 조절해주는 ‘트루톤 디스플레이’와 보다 풍부한 색 영역을 표현해주는 ‘P3’ 등 최신 디스플레이 기술이 적용돼 그래픽 작업 등을 할 때 충분한 성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번 아이패드 프로는 충분해 보였던 것들을 불충분하게 만들어버렸다. 시각적으로 예민한 사람에게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핵심은 ‘프로모션’ 기술이다. 이 기술은 120Hz의 화면 재생률(주사율)을 지원한다. 어린 시절 배웠던 교과서 지식을 떠올려보자. 디스플레이의 기본적인 원리는 정지된 이미지를 여러 장 보여줘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휴대용 기기에 사용되는 디스플레이는 대개 60Hz의 화면 재생률을 갖추고 있다. 초당 60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걸 2배로 늘리면 어떻게 될까. 과장을 좀 보태면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1’을 보다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보는 기분이다. 그 정도로 시각적으로 느끼는 감각의 차이가 크다. 터치 디스플레이를 조작할 때 화면 반응이 더욱 자연스럽다.

▲ 120Hz 화면 재생률은 아쉽게도 영상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다. 가까운 아이패드 판매점을 찾아가 보자.
▲ 120Hz 화면 재생률은 아쉽게도 영상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다. 가까운 아이패드 판매점을 찾아가 보자.


“어썸(awesome, 기막히게 좋은)”



화소 밀집도(ppi)를 높인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스티브 잡스와 하나가 돼 외친 말이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로 인한 화면의 변화는 선명하게 눈으로 와닿았다.

이번 프로모션 기술은 레티나에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직접 체감되는 변화다. 메인 화면에서 손가락을 좌우로 넘겼을 때 화면 전환의 부드러움만 봐도 알 수 있다. 새로운 아이패드 프로를 경험한 뒤로 내겐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다른 모바일 기기 화면을 프레임 단위로 끊어보는 능력이다. 그리고 나직이 ‘어썸’을 읊조렸다.

화면 재생률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배터리 소모량은 늘기 마련이다. 화면에 더 많은 정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전력 문제를 가변 재생률을 통해 해결했다. 상황에 따라 재생률을 달리 적용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120Hz 재생률을 나타내지만, 웹페이지나 문서를 보는 등 화면이 멈췄을 때 화면 재생률은 24Hz까지 낮아진다.

영화를 볼 때는 영화의 프레임 속도에 재생률을 맞춰준다. 또 영상을 작은 화면으로 띄웠을 때 해당하는 화면에만 재생률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디스플레이와 칩셋, OS 3개의 애플 기술이 조합된 콤비네이션을 통해 이뤄낸 결과물이다.

▲  새롭게 추가된 액세서리 가죽 슬리브에는 애플 펜슬을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됐다.
▲ 새롭게 추가된 액세서리 가죽 슬리브에는 애플 펜슬을 보관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됐다.

화면 재생률이 높아지는 것과 생산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① 화면 재생률이 높아진다 ② 어썸을 외친다 ③ 기분이 좋아진다 ④ 기분이 좋아져서 업무 능률이 오른다 ⑤ 생산성이 증대된다’ 같은 것일까.

아이패드는 기본적으로 터치스크린 조작 방식의 UX·UI를 갖췄다는 점에서 화면 재생률의 향상은 세밀한 조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애플 펜슬’ 작업 시 확인할 수 있다.

애플 펜슬과 스마트 키보드, PC를 대체할까


아이패드 프로가 처음 나왔을 때 좋은 평가를 받은 부분 중 하나가 애플 펜슬이다. 전문가들은 지연시간 등의 성능에 있어 애플 펜슬에 높은 점수를 쳐줬다. 지연시간이란 스타일러스 펜으로 선을 그을 때 화면에 표시되는 선이 스타일러스의 움직임을 따라오는 속도를 말한다. 지연시간이 짧아야 정밀하고 자연스러운 작업이 가능하다.

아이패드 프로 펜슬 시연1
▲ 아이패드 프로 펜슬 시연1

눈에 보이는 선과 스타일러스 펜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쾌적하게 작업할 수 없다. 애플 펜슬 자체는 그대로지만 증가한 화면 재생률 덕분에 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지연시간은 이전의 절반 수준인 20ms로 줄었다.

▲  애플 펜슬을 아이패드 프로와 페어링하거나 충전할 때 ‘파초선’으로 변신하는 건 여전하다.
▲ 애플 펜슬을 아이패드 프로와 페어링하거나 충전할 때 ‘파초선’으로 변신하는 건 여전하다.

‘스마트 키보드’는 달라진 화면 크기에 맞춰 새롭게 제작되긴 했지만, 이전 모델에 비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한·영 전환 버튼 정도가 새롭게 추가됐다. 스마트 키보드는 애플 펜슬과 마찬가지로 아이패드 프로 제품군에만 적용되는 액세서리다.

블루투스 키보드와 비교하면 제품 일체감과 입력 속도 면에서 우월하다. 블루투스 키보드의 경우 미세하게 입력 지연시간이 느껴지지만 스마트 키보드의 경우 화면에 표시되는 문자와 키보드 입력 간에 어긋남이 없다. 키감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비슷한 계열의 ‘서피스 프로’ 키보드 커버에 비하면 여전히 아쉽다.



그렇다면 애플 펜슬과 스마트 키보드, 터치 화면 3가지 입력 방식으로 이뤄진 생산성 도구는 PC를 대체할 수 있을까?



2015년 아이패드 프로가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의문부호가 따라 붙은 명제다.

당시 <블로터>는 차세대 생산성 도구의 문제는 입력 장치의 문제라고 규정하며 ‘탈부착 키보드와 개선된 터치 입력 방식, 스타일러스는 지금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대체하게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꿔 대답했다. 당시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내가 내놓는 답은 “여전히 아직은 아니다”이다.

▲  아이패드 프로 카메라로 4K 영상을 찍고 ‘아이무비’ 등으로 바로 편집할 수 있다.
▲ 아이패드 프로 카메라로 4K 영상을 찍고 ‘아이무비’ 등으로 바로 편집할 수 있다.

▲  RAW 이미지 파일도 버벅이지 않고 보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패드용 ‘라이트룸’은 PC버전의 기능을 다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 RAW 이미지 파일도 버벅이지 않고 보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패드용 ‘라이트룸’은 PC버전의 기능을 다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애플 측의 홍보처럼 4K 동영상을 편집할 수도 있고, 정교한 3D 모델을 렌더링할 수도 있고, 복잡한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 수 있지만 아직 PC의 생산성은 따라가지 못한다. 몇몇 상황에서는 태블릿의 유연성 덕분에 더 나은 사용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총체적인 생산성은 PC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건 온전히 애플의 문제라기보다 새로운 입력 방식의 생산성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개발자들도, 사용자들도 아직 준비가 덜 된 탓도 있다. 우리는 마우스의 관성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  애플 펜슬은 아이디어를 스케치할 때 더없이 좋은 입력 장치다. 조금의 그림 실력만 있으면 캐리커처도 쓱싹이다. (그림: 블로터 김인경 기자)
▲ 애플 펜슬은 아이디어를 스케치할 때 더없이 좋은 입력 장치다. 조금의 그림 실력만 있으면 캐리커처도 쓱싹이다. (그림: 블로터 김인경 기자)

애플이 아이패드 프로를 통해 꿈꾸는 미래가 ‘PC에 대한 완전한 대체’도 아니다. 애플은 새로운 방식의 컴퓨터를 만들고자 한다. 애플의 아이패드 프로 홍보 문구도 ‘컴퓨터에서 한 걸음 더’이다. PC의 대체제가 아닌 아예 다른 분류의 컴퓨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화면 큰 스마트폰에서 새로운 입력장치와 함께 새로운 사용성이 부여된 태블릿PC는 차세대 컴퓨터로서 다시 한 번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이패드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향상시킨 ‘iOS11’은 이러한 질문에 더 명확한 답을 내리도록 도울 것이다.

올해 2분기 아이패드 판매량은 3년만에 처음으로 증가했다. 저가형 아이패드가 시장에 통한 것이다. 이제는 아이패드 프로가 증명할 차례다. 처음 바위를 굴려올린 시지프스와 수 십 번 바위를 굴려올린 시지프스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애플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