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

  • 입문용은 아니지만 입문자에게도 괜찮다


단점

  • 애매한 무게, 700g.

  • 페이퍼 에디션이라기엔 아쉬운


추천 대상

  •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



어릴 땐 그림을 곧잘 그렸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뒤에서 “네가 돌잡이로 연필을 잡아서 그래”라고 말했다. ‘우리 반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렸던 것도 모두 돌잡이로 연필을 잡아서 그랬을까.

하지만 ‘우리 반 그림 잘 그리는 아이’ 타이틀은 쉽게 다른 아이에게로 넘어갔다. 그 애들에게 그림은 취미이자 특기였고 이 세상에는 그런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나의 취미는 특기가 될 수 없었다. 그림이 점점 재미없어졌다.

▲  기자가 되니 아버지는 또 말했다. '돌잡이로 연필을 잡아서 그래.'
▲ 기자가 되니 아버지는 또 말했다. "돌잡이로 연필을 잡아서 그래."

사라진 취미를 찾아서

지난해 와콤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해 태블릿을 구경하던 중 ‘와콤 인튜어스 프로 페이퍼 에디션’이 눈에 들어왔다. 인튜어스 프로 페이퍼 에디션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아날로그 작업과 디지털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펜 태블릿 제품이다. 일반 펜 태블릿인 인튜어스 프로에 종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능이 살짝 추가됐다.

중형 기준으로 크기는 338×219×8mm, 무게는 700g, 가격은 49만원이다. 대형 모델의 가격은 67만원. 인튜어스 프로는 사실 전문가용 라인업이다. 입문자용 라인업은 뱀부, 인튜어스 제품군 정도다. 전문가용 제품군이 좀더 세밀하게 압력을 감지한다고 한다.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태블릿 제품도 많고, 몇 만원에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입문용 태블릿도 많다. 그중 인튜어스 프로 페이퍼 에디션을 쓴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리 한줄평을 남기자면, "모처럼 너무 재밌었다”. 아무래도 이 글은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전문가보다는 나처럼 다시 또는 새로이 취미를 찾고 싶은 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첫인상은 어렵기만 했다. 생김새는 단순했지만 쓰임을 알 수 없는 버튼들이 탑재돼 있었고 프로펜2와 파인팁 펜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와닿지 않았다. 태블릿 본체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무작정 그리기에 앞서 설치 과정이 필요하다. 와콤에 가입하고, 와콤 홈페이지에서 잉크스페이스 앱을 내려받고 와콤 홈페이지에서 제품에 맞는 드라이브를 찾아 노트북에 설치해야 한다. 컴맹인 사람은 이 과정에서 시간이 좀 걸린다.

노트북과 태블릿도 연결해야 한다. 장치 측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러서 태블릿을 깨우고, 인튜어스 프로의 둥근 홈 버튼을 와콤 로고 옆의 LED 점이 깜박거릴 때까지 누르면 된다. 블루투스가 연결되면 준비는 끝.

종이와 펜, '디지털 노트' 잉크스페이스 앱

자, 이제 태블릿과 종이, 파인팁 펜을 준비하자. 노트북과 태블릿을 연결하고 공책에 낙서하듯 종이에 그림을 그리면 잉크스페이스 앱에 저장된다. 잉크스페이스 앱은 디지털 노트라고 보면 된다.

▲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성장이 멈춘 필체
▲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성장이 멈춘 필체

▲  종이에 적은 모습.
▲ 종이에 적은 모습.

아래 잉크스페이스 화면에서 와이파이처럼 생긴 버튼을 누르면 종이에 끄적거리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아주 두꺼운 종이가 아니라면 어떤 종이든 상관 없고, 쓸 수 있는 종이가 1장이라도 괜찮다. 디지털로 옮겨지니 같은 종이에 덧대 그려도 된다. 블루투스로 연결하고 노트북 없는 곳에서 메모용으로, 간단한 스케치용으로 이 기능을 쓸 수도 있다.

단, 종이에 그린 그림을 저장하려면 꼭 태블릿의 둥근 버튼을 눌러야 한다. 부족한 기억력 탓에 공들여 그린 낙서를 몇 번이나 허공에 날렸는지. 데이터는 와콤 클라우드에 저장된다.

▲  왜 1991년 5월1일로 설정돼 있는 걸까. 미스터리.
▲ 왜 1991년 5월1일로 설정돼 있는 걸까. 미스터리.

파인팁 펜의 사용감은 여느 평범한 볼펜과 같다. 디지털로 옮겨진 선의 느낌은 볼펜과 연필 사이 그 어디쯤. 꾹 눌러 진하게 그리고, 얇게 표현할 순 있지만 그 이상의 세밀한 표현은 좀 어려웠다.

▲  디테일한 설정이 불가능하다.
▲ 디테일한 설정이 불가능하다.

페이퍼 에디션이라고 하기에 포토샵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알고 보니 잉크스페이스 앱에서만 쓸 수 있었다. 잉크스페이스 앱은 사용성에 제약이 크다. 디지털임에도 불구하고 그릴 수 있는 공간이 한정적이고, 레이어를 쪼개고 나눌 수는 있지만 편리하고 유연한 과정은 아니다.

▲  예제 : 레이어 1.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성장이 멈춘 그림 실력.
▲ 예제 : 레이어 1.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성장이 멈춘 그림 실력.

그림을 그린 위치도 바꿀 수가 없다. 저장된 그림은 텍스트, JPG, 벡터, PNG, PSD로 별도 저장이 가능한데, 각 그림의 위치를 이동시키고 싶으면 이렇듯 파일로 저장하고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등 원하는 소프트웨어에서 불러와 하나의 레이어로 만들어야 한다. 채색도 잉크스페이스 앱으로는 할 수 없다.

맞다. 상당히 불편하다.

 

▲  예제 : 레이어 3개를 합친 모습. 레이어 하나당 3개 그림을 그렸다.
▲ 예제 : 레이어 3개를 합친 모습. 레이어 하나당 3개 그림을 그렸다.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서툴러 펜으로 그리는 편이 마음은 더 편했다. 오밀조밀 그릴 수 있으니 (본인 기준) 그림도 좀더 잘 그려지는 듯도 하고. 하지만 이런 낙서에는 스마트펜이 더 낫겠더라.

펜은 쓸 만큼 썼고 잉크스페이스 앱을 좀 벗어나고 싶었다. 종이를 걷어내고 와콤 프로펜2를 손에 쥐었다.

리뷰가 끝날 때쯤 비로소 적응했다

▲  집에 있는 만년필을 쥐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 집에 있는 만년필을 쥐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와콤 프로펜2는 내가 쓰기엔 좀 컸다. 몸통이 두꺼워 손으로 쥐고 그리자 금세 손에 뻐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검지와 중지가 닿는 부분에 2개의 버튼이 사이 좋게 달려 있다. 이 버튼이 수행하는 기능을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손에 자꾸 걸리는 게 영 번잡스럽게 느껴져 최대한 버튼이 안 닿게 쥐고 그렸다.

태블릿 펜을 손에 익히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다. 종이에 그리던 것과는 너무 다른 사용감에 선 하나 제대로 긋기가 어려웠다. 오랜 적응 기간이 필요할 듯했다. 다른 리뷰를 찾아보니 이 버튼의 설정을 바꿔 마우스 휠, 확대·축소 등 다양한 기능으로 쓸 수 있는 듯하다. 펜 사용이 익숙해지면 버튼 역시 유용할 것 같았다.

▲  프로펜2의 꽁무니.
▲ 프로펜2의 꽁무니.

프로펜2 끝에는 지우개가 있다. 실제 지우개는 아니고, 그림을 지우고 싶을 때 펜을 뒤로 돌려 태블릿에 슥슥 그으면 그림이 지워진다. 포토샵으로 간단한 후기를 그려보았다.

사실 포토샵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그리는데 자꾸 화면이 돌아가 애를 먹었다. (화면이 돌아간 이유는 아직도 미궁 속···.)

필압은 8192단계를 지원한다. 개인적으로 필압은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또 펜을 움직이면 포토샵 상단에 펜의 현재 모습이 애니메이션처럼 보여지는데 인식률이 괜찮아 보였다. 다만 지연속도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다른 펜 제품을 써보지 않아 비교하긴 어렵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느껴질 정도로 느렸다. 또 펜이 두꺼워서 그런지 너무 기울이면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초급자 입장에서 인튜어스 프로 페이퍼 에디션은 생각보다 사용하기 어려웠지만 기대 만큼은 만족스러웠다. 태블릿을 익히는 데 열중하느라 여기저기 탑재된 버튼을 미처 다 활용하지 못했던 점은 아쉽다. 우습게도 인튜어스 프로 페이퍼 에디션으로 말미암아 스마트펜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생겨났다. 종이와 디지털의 만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라 했던가. 도구가 있다고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지만, 범인(凡人)은 도구 덕을 본다. 좋은 도구를 갖추고 있으면 일단 마음이 든든한 걸. 무언가를 시작했다고 해서 꼭 잘 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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