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는 직장인을 위한 익명 커뮤니티 앱이다. 직장생활의 고충이나 회사 내부 문제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익명의 힘은 강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논란이 블라인드를 통해 시작됐고, 최근 확산 중인 '미투'(Me too) 운동 역시 별도 게시판을 통해 활발히 논의 중이다. 한국에서 블라인드는 한때 '블라인드 금지령'이라는 사례가 나올 만큼 기업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대나무숲이 필요한 곳은 국내만이 아니었다. 블라인드는 3년 전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아예 본사도 옮겨갔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장 규모 때문이다. 한국에 비해 익명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자 폭이 훨씬 넓었다. 미국에서 블라인드는 구글, 아마존, 우버 등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굵직한 이슈들이 논의되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  이원신 팀블라인드 미국 총괄
▲ 이원신 팀블라인드 미국 총괄

"처음엔 미국 사람들은 워낙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별로 할 이야기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디서나 회사원이라는 신분은 공개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요." - 이원신 블라인드 미국 총괄

블라인드는 미국 서부 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정착했다. 이용자 수는 사내 방침상 공개하지 않지만, 대신 기업별 전체직원 대비 가입률을 밝혔다. 리프트·글래스도어·핀터레스트는 70%, 링크드인·마이크로소프트·에어비앤비·우버·야후는 50%, 아마존·페이스북은 30%의 직원이 블라인드를 이용한다. 어림짐작으로도 엄청난 수의 테크 기업 종사자가 익명 커뮤니티 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습득 속도가 빠른 산업군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  블라인드 앱 소개 이미지
▲ 블라인드 앱 소개 이미지

한국과 미국은 같은 블라인드 앱을 이용하지만 조금 다른 특징을 보인다. 한국 서비스가 좀더 회사에 대한 불만과 고충을 성토하는 자리라면, 미국 서비스는 회사 정보와 직무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는 비중이 크다.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미국 테크 기업 종사자들은 워낙에 이직이 잦기 때문이다. 익명 인트라넷을 가진 몇몇 회사들도 있지만, 이직 문제처럼 예민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엔 그래도 어렵다. 이원신 블라인드 미국 총괄은 "미국에서 블라인드는 회사 일을 폭로하는 게 메인 아젠다가 아니다"라며 "나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더 생산적인 대화를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공간 같다"고 설명했다.

미국 블라인드 앱에서 나오는 고민들만 살펴봐도 기본적으로 실리콘밸리의 직장 문화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저 회사한테 PIP(Performance Improvement Plan, 회사가 직원과 퍼포먼스에 대해 조정하는 시간. 주로 계약에 대한 경고 사인이다)를 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축 말고 유니콘 기업의 주식을 사는 건 어떨까요' '비자 문제 처리를 위해 해외 지사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해준다는데 어떤가요'와 같은 질문이다. 이원신 총괄은 "미국은 캘리포니아주만 해도 한국보다 크지 않나"라며 "그만큼 이 사람들에겐 자신과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동안 부족했고, 동시에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  팀블라인드 미국 본사가 입주해있는 샌프란시스코 '위워크 미드마켓점'
▲ 팀블라인드 미국 본사가 입주해있는 샌프란시스코 '위워크 미드마켓점'

블라인드는 철저한 검증 프로세스를 통해 미국 테크 기업 종사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회사 계정의 이메일로만 가입할 수 있고, 이메일 당 하나의 계정만 만들 수 있다. 익명 커뮤니티면서 회사 이메일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테크 산업 종사자들이다. 블라인드는 보안에 있어서만큼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블라인드는 개인 식별 정보를 저장하지 않는다. 해커들에게 가치 있을 만한 정보를 아예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데이터들을 단방향(one-way)으로 암호화시켜 복구가 불가능하다.

"테크 분야다보니 아무래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하루는 글로벌 IT 기업에서 보안 담당하는 분이 연락이 왔어요. '해킹을 시도해봤는데 너네 보안을 엄청 잘해놨더라'라고요.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스스로 '여기는 안전하구나'라는 걸 느끼도록 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  이원신 팀블라인드 미국 총괄
▲ 이원신 팀블라인드 미국 총괄

미국 블라인드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역설적이게도 실리콘밸리에선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기가 더 어렵다.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블라인드 이용자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어떤 수준에서 이야기해야 옳은지 몰랐었는데, 오픈해서 이야기하니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됐다'라는 피드백을 전하기도 한다.

이원신 미국 총괄은 "미국 테크 인더스트리는 기업과 직원 모두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ive)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라며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정책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그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로 토론이 이뤄진다"라고 말했다. 미국 글로벌 기업들은 최근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회사마다 최고다양성책임자(CDO, Chief Diversity Officer)라는 직책을 운영할 만큼 적극적으로 조직 구성 정책을 고민하고 있다. 블라인드에서는 이같은 실리콘밸리의 다양성 이슈와 비판 지점들이 끊임없이 논의된다.

▲  위워크 미드마켓점 라운지 내부
▲ 위워크 미드마켓점 라운지 내부

미국 블라인드는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점점 인정받는 플랫폼이 되고 있다. 익명 커뮤니티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잘 활용하려고 한다. 회사 차원에서도 회사 내부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을 체크하고 이슈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원신 미국 총괄은 "블라인드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중립적인 플랫폼"이라며 "우리는 이 공간을 제공하고 목소리가 나올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회사 측이 불편해할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용을 장려하는 움직임까지도 보인다. 신입사원 교육자료에 등장하거나 임원들이 직원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블라인드는 앞으로도 테크 업계에서의 성장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더욱 다양한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말할 공간을 마련한다. 이를 위해 한국에만 있던 '스타트업 라운지'를 미국에도 런칭하는 등 이용자 폭을 넓히는 데 힘쓸 예정이다. 같은 측면에서 설문조사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미국 테크 업계의 목소리를 정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블라인드는 자사 서비스가 한 산업 전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플랫폼이 되기를 원한다. 이원신 총괄은 "테크 산업 종사자들의 의견을 양지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계속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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