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2일, LocalBitcoins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비트코인 주간 거래량이 1,974 BTC(한화 약 81억원)로 전주 대비 11% 증가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베네수엘라 비트코인 거래량 중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베네수엘라에 다시 한번 ‘비트코인 투기 열풍’이 불기라도 한 것일까요? 꼭 그래서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네수엘라 국민이 비트코인을 거래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왜 암호화폐를 사용할까


유엔 난민기구에 따르면 매일 5천여명의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체류 혹은 다른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콜롬비아 국경을 넘습니다. 또한 매일 3만1천여명의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식량, 의약품을 구하기 위해 콜롬비아에 방문한 후 베네수엘라로 다시 돌아갑니다. 베네수엘라를 떠난 국민은 3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베네수엘라 국민 열명 중 한 명 꼴입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도 높은 수준의 살인율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식량난에 범죄자들조차 버티지 못하고 국가를 떠나면서 살인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부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3천억 배럴로 추정되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은 양으로 세계 1위 규모입니다. 70년대 석유파동을 통해 베네수엘라는 경제 호황을 경험했지만, 그후에도 전체 수출의 96%를 석유가 차지할 만큼 국가 경제의 석유 의존도가 심화됐습니다. 미국의 셰일 가스 생산으로 석유 수출이 줄어 외교 관계에서도 이전과 같은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유가 치킨게임’이 심화되며 석유의 가격이 하락했습니다. 이때문에 석유에 의존하던 베네수엘라는 국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국채와 화폐를 찍어내게 됩니다.


베네수엘라 의회에 따르면 2017년 11월 이후 1년간 물가 상승률은 130만퍼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9년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이 1천만퍼센트에 달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이러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국민들은 하루 평균 임금으로 계란 1.7개를 간신히 살 수 있는 수준입니다. 생필품과 의약품은 사치재가 되었습니다. 시장에는 썩은 고기를 팔며 이마저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찾습니다. 식량난으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평균 약 10kg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자원의 저주, 하이퍼 인플레이션 뿐만 아니라 정치 부패의 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Nicolás Maduro Moros) 대통령은 지난 5월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하여, 6년 동안 추가로 재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선거 때 사실상 독재라며 국제적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두로 대통령은 올해 7월 1만7천명의 군인을 승진시켰습니다. 반발하는 국민들을 군사력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라는 추측이 유력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네수엘라 국민은 정부의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 본국에 있는 가족에게 번 돈을 송금하기 위해 수수료가 비교적 적고,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비트코인’을 송금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더욱이 베네수엘라의 살인적인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비하면 ‘비트코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입니다. 또 베네수엘라는 전기 요금이 저렴하고, 채굴로 버는 암호화폐가 대다수 국민의 임금보다 많기에 많은 국민들이 암호화폐 채굴에 뛰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 정부, 국영 암호화폐를 발행하다


2017년 말과 2018년 초 비트코인 가격이 최고가를 갱신하며, 많은 국가가 암호화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규제를 완화해가며 친암호화폐 정책으로 기업들을 유치하여 ‘크립토 허브’를 구축한 국가와, 반대로 투기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에 규제를 강화한 국가도 있습니다. 이 와중에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은 2017년 12월3일 ‘석유 등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베네수엘라의 법정 암호화폐’를 출시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발표는 정말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20일(현지시간) 세계 최초로 국가가 천연자원을 담보로 발행하는 암호화폐인 ‘페트로(PTR)’의 프리세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리세일은 같은 해 3월19일(현지시간)에 종료되었으며 마두로 대통령은 이를 통해 50억달러를 조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페트로를 구매할 수 있는 페이지, 그러나 신원인증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다.

지난 11월5일, 페트로의 퍼블릭세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토큰 세일은 진행되고 있으며 관련 홈페이지에 14쪽짜리 영문 백서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백서에서 페트로의 가격은 석유(50%), 금(20%), 철(20%), 다이아몬드(10%)로 구성된 상품바스켓에 기반하며, 석유 가격을 1배럴당 60달러로 산정하여 초기 페트로 판매 가격을 60달러로 정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단, 프리세일 때는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30%의 할인율을 적용했습니다.





페트로 백서에 삽입된 페트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한 도식

페트로의 발행 선언 이후 약 1년이 지났습니다. 재정 상태가 극도로 열악한 베네수엘라가 최초로 법정 암호화폐를 발행한다고 선언했기에 더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페트로에 대한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페트로의 백서는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더리움 개발자인 조이 저우(Joey Zhou)가 페트로의 백서가 대시의 백서 형식과 작업증명 채굴 알고리즘을 베꼈다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재 퍼블릭 세일과 함께 공개된 백서에는 석유와 천연자원들을 어떻게 담보화할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지난 3월19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페트로 거래를 전면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려,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타임지는 페트로의 발행에 러시아가 개입되어 있으며 베네수엘라와 러시아는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페트로 발행을 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욱이 러시아가 페트로 프리 세일의 30%에 상당하는 물량을 구매하였다는 의혹을 제시되기도 했는데, 이에 러시아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반박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페트로의 상장 거래소를 발표하였는데, 이중 비트파이넥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3월27일(현지시간) 비트파이넥스는 이를 전면 부정하며, 페트로는 미국 제재 등 명백한 위험 요소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로이터는 4개월간 취재를 한 결과 베네수엘라 정부가 페트로의 담보가 될 것이라 주장한 석유 매장지 아타피레 역시 페트로와 연관된 흔적이 없었으며,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실제로 판매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두로 정부는 페트로를 베네수엘라 경제와 연동하여 상용화할 계획안들을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


지난 11월8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의 국영 석유회사(PDCSA)는 석유수출기구(OPEC)에 원유가격과 연동된 페트로를 제시하고, 실제로 모든 원유 거래 결제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지난 12일(현지시간) 정부는 국민연금을 페트로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번 결정은 국민의 동의 없이 실행되었고, 연금 수령층이 노년층임을 고려했을 때 큰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됩니다.


심지어 지난 10월8일(현지시간)부터 베네수엘라 정부는 여권 발급과 갱신을 페트로로만 결제할 수 있게 바꿨습니다. 여권을 발급하는데 2 페트로, 갱신하는데 1 페트로가 필요합니다. 이 금액은 베네수엘라 국민 월평균 최저임금의 4배에 상당하는 금액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 해외로 떠나 일을 하거나, 국경을 넘나들어야 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입니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작년 12월 마두로 대통령은 페트로로 발행 선언과 함께 페트로를 활용하면 ‘금융자주권(monetary sovereignty)’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제적 금융 조달 방식을 활용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암호화폐는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지만, 미국 달러를 법정 화폐로 채택할 경우 ‘달러리제이션(Dollarization)’의 부작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들에 ‘대안책’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암호화폐의 이용이 ‘금융자주권’과 통하는 맥락이 있습니다.


더욱이 아프리카의 국가들처럼 낮은 계좌 개설율 등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해외에서 일한 후 본국으로 송금하는 경우 높은 수수료를 부담하기 어려운 계층에게는 암호화폐가 대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텔라루멘의 경우 이러한 개발도상국가와 금융 소외 계층을 타겟으로 삼아 해외 송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2월28일 타임지에는 베네수엘라의 국민들에게 비트코인이 어떻게 금융 대안책으로 작동하여 이점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글(Why Bitcoin Matters for Freedom)이 기고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례처럼 암호화폐는 스타트업을 포함한 기업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베네수엘라의 법정 암호화폐 페트로를 의뭉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데도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2016년 12월 베네수엘라 정부는 ‘조국카드(carnet de la patria)’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조국카드란 전자태그가 부착된 신분증입니다. 이는 중국의 사실상 국영기업에 가까운 ZTE의 기술을 이용하였습니다. 마두로 정부는 현금을 나눠주거나 식량 보조금을 지급하고, 가입하지 않을 시 공공 서비스 이용에 제한을 두는 등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조국카드 사용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드를 이용하게 되면 국민들의 기본적인 개인 정보 뿐만 아니라 보조금 수령 여부, 부동산 소유권, 지지하는 정당, 소셜미디어 이용 기록 등 민감한 사적 정보가 정부의 빅데이터 아카이브에 축적되게 됩니다. 더욱이 투표 시 조국카드의 QR코드를 이용하는데, 이를 통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정부가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투표하지 않을 시 혜택이 제한됩니다. 따라서 사실상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스템은 ‘빅브라더’라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베네수엘라 정부는 기술을 체제 유지 및 독재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하고 있는데, ‘탈중앙화’가 모토인 블록체인을 통해 발행되는 암호화폐 마져 ‘정부의 주머니 채우기’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이란도 지난 7월 미국의 경제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암호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란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소를 검열하고 있다는 제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같은 기술임에도 그 쓰임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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