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은 익숙하지만 자율운항은 왠지 낯설다. 이유가 있다. 선박의 자율운항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기업은 전세계를 둘러 봐도 드물기 때문이다. 최근에서야 미국, 이스라엘 등에서 자율운항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스타트업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2015년부터 선박 자율운항 시스템을 개발하겠다며 바다로 나선 국내 스타트업이 있다.

씨드로닉스(Seadronix)는 안전한 해양산업을 목표로 창업한 기술 스타트업이다. 자율운행기술을 연구하던 카이스트 대학원 동기 4명이 모여 2015년 12월 법인을 설립했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건 2016년 8월 무렵이다. 인공지능(AI) 기반의 반자율운항(운항보조) 및 자율운항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팀원은 9명. 7명이 개발자다.

▲  | 지난 15일 만난 박별터 씨드로닉스 대표
▲ | 지난 15일 만난 박별터 씨드로닉스 대표

씨드로닉스 박별터 대표는 연구실에서 자동차, 비행기, 잠수함, 실내로봇, 선박 등 다양한 종류의 자율운행을 연구했다. 그중에서도 선박을 택한 건 “선박 자율운항기술이 ‘황무지’에 가까워서”였다.

그동안 무인선은 연구나 탐사, 정찰 등 특수목적으로 제작돼 왔다. 가격이 비싸 민간에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박 대표는 "국제 선박사고 원인 75%는 사람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자율운항기술을 민간 선박에 확대하면 해양사고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라며 “당시 바다에서 무인화 시스템을 구현하려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세계 최초와 세계 최고를 동시에 이룰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박사 과정을 밟고 왜 창업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부모님도 그러셨죠. 전 기술 창업은 ‘박사라서’ 할 수 있는 거라고 대답했어요. 연구로 끝나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기술로 사업을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거든요.”

땅과는 다른, 바다의 알고리즘

육지와 바다는 달랐다. 극명하게 다른 건 장애물의 종류였다. 불규칙하게 몰아치는 파도를 장애물과 구분해 인식해야 했고 이밖에 부유물, 그물, 선박, 제트스키 등 육지에서는 볼 수 없던 각종 장애물이 바다에 넘쳐났다.

장애물 측정거리도 달랐다. 선박은 장애물을 발견하고, 배를 돌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자동차와 판이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물체를 발견하고 피할 때, 자동차는 바로 반응이 오지만 물에서는 배가 방향을 틀더라도 즉각적이지 않다”라며 “수백미터 멀리 있는 장애물을 카메라로 인식하고, ‘예측제어’해 알아서 피해가는 자율운항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땅 위에서 움직이는 자율주행을 연구하다 배를 다루니까 신기했어요. 육지의 알고리즘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라는 걸 알게 되니 재미있기도 했지만 안 되는 게 많아 힘들기도 했죠.”

바다라서 겪는 고충 한 가지. 씨드로닉스는 AI 학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 확보가 중요하다. 그런데 선박 자율운항은 테스트가 쉽지 않다. 배가 필요하고, 바다가 필요하다. 박 대표는 “실험실에서는 분명히 됐는데 바다에 나가면 안 되는 게 많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씨드로닉스는 작은 보트부터 화물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선박에 데이터 수집장치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모은다. 이를 토대로 개발한 기술은 씨드로닉스 소유의 소형 자율운항 선박에서 시험해보고 있다.

바다에서 찾은 답

사업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박별터 대표는 “자율운항 선박 시대가 올 거고, 거기에는 우리 시스템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장에 진출하니 녹록치 않았다. 선박 인프라, 화물수송 등 다른 요소도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했다”라며 “우리만 개발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장은 한순간에 계단식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학교에 있을 땐 최신 기술을 이용해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최신 기술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잘 돌아가는 수준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 없이’ 돌아가는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신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따라갈 발자취가 없다보니 사업모델을 설계하는 데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현장에서 도선사, 선장 등 관련업 종사자들의 애로사항에 귀를 기울이며 사업모델을 가다듬었다. 지난해 울산항만공사(UPA)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에서 지원팀으로 선정되면서 항만공사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박 접안보조시스템(AVISS, around view intelligence system for ship)’이 탄생했다.

▲  | 선박위치정보를 보여주는 '마린트래픽'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연안에 배가 몰리면서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규모가 큰 선박은 위치를 관제탑에 신고하고 위와 같이 위치를 확인하며 충돌을 방지할 수 있지만 작은 선박은 신고 의무가 없다고 한다.
▲ | 선박위치정보를 보여주는 '마린트래픽'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연안에 배가 몰리면서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규모가 큰 선박은 위치를 관제탑에 신고하고 위와 같이 위치를 확인하며 충돌을 방지할 수 있지만 작은 선박은 신고 의무가 없다고 한다.

선박 접안보조시스템은 카메라를 기반으로 한 인지 시스템이 선박과 부두 간 거리, 접안속도 및 장애물과의 거리 등을 파악해 모바일로 알려주기 때문에 도선사가 보다 안전하고 수월하게 접안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자율운항만 바라볼 땐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는 건 생각도 못했다”라며 “현장에 있는 분들과 항만공사 분들의 목소리 덕분에 이런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해당 시스템은 현재 접안이 가장 까다로운 곳으로 알려진 울산본항 4부두에 설치돼 있다.

선박에 탑재하는 충돌경보 솔루션도 있다. 선박의 둘레에 센서를 설치하고, 센서가 장애물을 인지하면 충돌경보를 통해 선원들에게 알린다. 박 대표는 “기존에 레이더가 감지하지 못했던 영역과 장애물이 있다. 이를 영상으로 보완하고자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요시하는 건 확장성이다. 카메라 기반의 솔루션을 개발하는 것 역시 비용 절감을 위해서다. 배의 크기에 상관없이 센서만 설치하면 적용이 가능한 솔루션을 개발하는 게 씨드로닉스의 목표다.

이런 분야에서도 잘 나가는 스타트업이 나온다면

창업한 지 3년여가 지났지만 국내에서 선박 자율운항기술을 개발하는 업체는 아직까지도 씨드로닉스가 유일하다. 시작이 빨랐던 만큼, 지금까지 모은 데이터가 곧 경쟁력이다. 시장 특성상 진입장벽이 높아 후발주자가 갑자기 등장해 빈틈을 노릴 일도 거의 없다. 박 대표는 선박에 최적화한 기술 역시 후발주자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  | '창업을 결심했을 땐 이런 마음도 있었어요. ‘망해도 내 손으로 망한다.’ 딱 그 마음이었어요. 스스로 선택하고 인생의 주도권을 갖겠다. 지금 딱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웃음)”
▲ | "창업을 결심했을 땐 이런 마음도 있었어요. ‘망해도 내 손으로 망한다.’ 딱 그 마음이었어요. 스스로 선택하고 인생의 주도권을 갖겠다. 지금 딱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웃음)”

"선박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 같아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죠. 반자율운항을 통해 하나의 수고를 덜면, 그만큼 다른 곳의 안전을 신경쓸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도선사분들을 보조하는 기술 자체가 거의 없었어요. 접안보조시스템은 도선사분들의 업무를 수월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자율운항 시스템으로 나아가기 위해 보조 시스템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갈 계획입니다."

올해 씨드로닉스는 제품을 정식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첫 매출을 일으키는 게 목표다. 박별터 대표는 "이런 분야에서도 스타트업이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사명감이 있다. 실제로 기술이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변화된 항만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며 "서해, 동해, 남해 삼면에 우리 제품을 전파하도록 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