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연구원으로 있는 정인성 씨가 쓴 <반도체 제국의 미래>는 반도체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반도체 현장밖에 있는 이들에게 반도체 사업의 특징들, 다른 분야와의 차이점을 소개하는 콘셉트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내용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다른 분야와 달리 어떤 업체가 다른 회사를 인수해서 규모의 경제로 승부를 걸기가 만만치 않다는 부분이다. 다른 기술 분야는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면 비용은 줄이고 효율성은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반도체 산업은 좀 다른 것 같다.

회사들마다 공정이나 사용하는 기술이 차이가 있어서, 통합을 한다고 해도 시너지를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M&A를 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각 회사들의 미세 공정 수준이 비슷하더라도 실제 사용하는 장비의 조합 및 마스크의 형태, 레시피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내 회사 입장에서는 최적의 장비 조합일 수 있지만 다른 회사 입장에서는 써먹기 힘든 공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똑같은 D램으로 보이지만 사용하는 도구는 일식집과 양식집 만큼 엄청난 차이가 날수도 있다. 피인수 회사의 장비를 공용화하거나 기술팀을 합치는 등의 시너지를 일으키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메모리 회사를 인수합병한 일이 없다."

"이는 미세공정이 진척됨에 따라 설비 투자 금액이 증가하고 장비의 조합이 많아지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일반 사업체라면 인수합병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거나 기술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시너지를 취할 수 있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불가능하다. 물량을 통해 얻어낸 시장 점유율은 시장 가격이 폭락할 경우 언제나 칼날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죽기 살기의 싸움판에 가깝다. 큰 돈을 들어 인프라를 투자했다고 반드시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불확실성 때문에 인프라 투자를 망설이면, 게임의 판에서 밀려나는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베팅'과 '승자독식', '치킨게임'과 같은 말들은 일상이다.

"행여나 이런 싸움에서 한번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된다. 이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제품 가격이 상승 반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바닥권의 회사 하나가 자신의 변동 비용 조차 매출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생산을 중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도난 회사보다 원가 상황이 아주 조금 나아서 적자만은 면했던 기업과 시장에서 가장 뛰어난 원가를 가진 기업의 상황이 같을리 없다. 단 1년의 테크놀로지 차이가 20~30% 원가 차이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술력이 1년만 차이가 나더라도 동일 매출 대비 얻어내는 추가 현금은 1.3배로 벌어지게 된다. 전자 기업의 경우 간신히 적자를 면하느라 힘들었던 한해였는데, 1등 기업은 무려 30%라는 제조업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영업이익률을 누리는 것이다. 1등 기업은 이 돈을 이용하여 다시 신기술을 개발하고 더 많은 공장을 짓고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일단 설비 투자를 집행하고 나면 연구개발과 재무 운영 이외에는 달리 해볼 수 있는게 없다. 게다가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경쟁자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쉴 수도 없다. 또한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틈새 시장으로 달아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30년간 용량당 메모리 가격이 100만배 가까이 하락한 원동력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들은 시장이 처음 생성되었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이 특성들이 조합되었을 경우 시장이 얼마나 파괴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회사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그저 첨단 산업에 진출하여 고부가가치를 누리고자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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