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안 통과 이후 블록체인 업계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추후 공개될 세부 시행령에 따라 업계의 명운이 크게 뒤바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행령이 규정하는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 범위, 책임 수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특금법 개정안 발의 당사자인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직접 소통의 자리를 마련했다. 30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가상자산 거래 투명화를 위한 특금법 시행령 토론회’에는 금융정보분석원(FIU) 고선영 사무관, 한국블록체인협회 이종구 자율규제위원장, 두나무 황순원 대외협력팀장 등을 비롯한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참석해 입장을 주고받았다. 특히 특금법 시행을 앞둔 블록체인 업계의 고민과 제안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탁상 시행령만은 피하고 싶다

배경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개정 특금법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FT)의 권고를 기반으로, VASP에게 은행에 준하는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은 블록체인 산업 규제 법안이다. 초기에는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이제는 가상자산이 정식 제도권에 편입된다는 사실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소화하려는 분위기다.

대신, 업계가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수준의 시행령 제정이다. 지금까지 국내에는 가상자산 산업을 명확히 규정할 업권법(근거법)이 전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 시행령이 마련된다면, 자칫 국내 블록체인 산업 전반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날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회 이종구 위원장은 업계 전반의 의견을 종합해 크게 세 가지 사항에 대한 시행령 제안 내용을 발표했다. 각각 VASP 규정 범위, 실명확인 계좌 발급 주체 범위, 그리고 트레블 룰(Travel Rule) 조정안에 관한 것들이다.

① VASP는 거래소와 수탁 사업자로 제한

이 위원장은 “VASP의 범위는 발생 가능한 자금세탁 위험 수준을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자금세탁과 거리가 먼 사업자들까지 VASP 신고 대상에 포함된다면 이들에게 부여되는 과도한 법적 책임과 기반 시스템 마련에 큰 부담이 따를 것이란 얘기다. 해외 입법 사례를 보더라도 업계는 VASP의 범위는 가상자산 거래소, 가상자산 수탁 사업자 정도로 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VASP에게 부과되는 정보보호인증체계(ISMS) 획득, 은행과의 공조가 필요한 실명확인 계정 확보 의무도 가상자산을 직접 예치, 수탁하는 원화 거래 사업자에 한하도록 제안했다. 보통 ISMS 인증만 하더라도 전체 과정에 수억원의 비용과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역시 자금세탁과 관련 없는 사업자들이 감당하기엔 적지 않은 부담이며, 실효성도 떨어진다는 이유다.

② 실명 계좌 발급 주체를 증권사 등으로 확대

이와 함께 ‘실명확인이 가능한 입출금 계좌’ 확보 의무에 따른 계좌 발급 주체도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는 은행만 실명확인 계정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은행이 혹시 모를 자금세탁 사고에 연루될 가능성을 우려, VASP와 실명 계좌 서비스를 맺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에 은행과 계약 중인 가상자산거래소는 불과 4곳(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에 불과하다. 나머지 거래소는 자체 법인 계좌를 사용하고 있는데, 만약 은행이 계약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특금법 시행 이후 전부 사업을 접어야 할 판이다. 또 만약 은행이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파기할 경우에도 VASP들은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업계는 실명확인 계정 개설이 가능한 주체를 증권사 등 ‘금융실명법상 금융회사’로 더 확장할 것, 그리고 VASP와 계좌 개설 주체 간 계약은 명확한 법적 근거 아래 체결, 존속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조정안의 마련을 촉구했다.

③ 트레블 룰 시행은 유보, 국제표준 마련이 우선

뜨거운 감자인 트레블 룰에 대한 논의도 빠지지 않았다. FAFT가 요구하는 트레블 룰은, 해외 자산거래를 중개하는 금융기업들은 송금-수취인에 대한 구체적인 신원 정보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규칙이다. 사실상 자금세탁 시도를 막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현재 제도권 은행들은 스위프트(SWIFT)란 국제 결제 시스템망을 통해 트레블 룰을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 업계는 아직 현실적으로 트레블 룰을 완벽히 이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정 수준의 익명성이 따르는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상 송금인의 정보라면 몰라도, 수취인의 정보까지 자유롭게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거래소 간 거래라면 양측 거래소가 송금-수취인 정보를 공유하는 식으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익명화된 개인의 블록체인 지갑으로 직접 송금하는 경우 수취인 정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트레블 룰도 성립될 수 없다.

이 밖에도 트레블 룰이 파괴되는 여러 구조적 허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당장 이를 강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또 금융권과 달리 아직 국제 표준과 관련 제정 기구가 부재한 가상자산 업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만의 독자적인 트레블 룰을 시행하는 것은 바람직하는 않다는 입장이다.

이에 이종구 위원장은 최소한 국제 표준이 마련되는 시점까지 트레블 룰 시행을 유보하고, 수취인 정보는 당분간 송금인이 제공한 내용을 보관하는 정도의 타협안을 FIU에 제안했다.

▲  시행령 관련 제안 내용을 발표하는 이종구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회 위원장
▲ 시행령 관련 제안 내용을 발표하는 이종구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회 위원장

업권법 마련도 조속히 이뤄져야

이종구 위원장은 “지금까지 FIU에서 업계의 목소리를 잘 경청주었다”면서도 “업계 발전을 저해하는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 아울러 “원칙과 일관성, 예측 가능성이 포함된 가상자산 업계의 업권법(근거법) 마련도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날 토론회에는 특금법 TF에 속한 금융정보분석원(FIU) 고선영 사무관이 참석해 이목을 끌었다. 비록 고 사무관은 대부분 질의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피했으나, “업계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현실적인 시행령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FIU의 입장을 재차 밝혔다.

한편, 개정된 특금법 시행령은 이르면 올해 8월 입법예고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법 시행은 내년 3월부터이며, VASP들은 6개월 이내에 자격 요건을 갖춰 FIU에 신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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