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지난해부터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의 리스 기준이 바뀌면서 주요 기업들의 재무구조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제회계기준은 높은 수준의 회계원칙으로 알려져 있죠.  기업이 경제적 실체를 잘 반영하도록 해 회계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K-IFRS는 지난해부터 리스(일정기간 부동산과 설비 등 기타 고정자산을 이용하는 계약)를 운용하는 기업이 사용권자산 등을 부채로 인식하도록 했습니다. 기존에는 임차료만 재무제표상 손익계산서에 인식했습니다. 리스 기준이 바뀌면서 기업들은 사용권 자산과 리스부채, 이자비용까지 재무제표에 반영하게 됐습니다.

항공사와 해운사는 리스 기준이 바뀌면서 부채가 급등했죠. 이들 업계는 대당 수천억원에 달하는 운송수단을 빌리고 있어 회계 기준 변경으로 부채비율이 상승했습니다. 유통업계도 대형마트 등 매장을 임대하고 있어 영향이 큰 업종으로 꼽혔습니다.

정유업계도 주유소를 리스하고 있어 회계 기준 변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현대오일뱅크는 회계기준 변경으로 부채비율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지난 8월 공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의 별도 기준 리스부채는 1조원을 넘었습니다. 올해 상반기 리스부채는 1조1720억원(비유동 리스부채 9863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7418억원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부채비율은 35.4% 증가해 171.2%를 기록했습니다.

▲  현대오일뱅크, 리스부채 현황./자료=반기보고서
▲ 현대오일뱅크, 리스부채 현황./자료=반기보고서

같은 기간 총차입금은 1조1846억원 증가해 4조4755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차입금과 리스부채가 증가하면서 부채비율이 높아졌습니다.

현대오일뱅크의 리스부채가 지난 6개월 동안 급등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3월 코람코자산신탁과 함께 SK네트웍스 주유소 302곳을 인수했습니다. 매각 가격은 약 1조3000억원으로 주유소 부지는 코람코가 갖고, 영업 자산과 인력 등은 현대오일뱅크가 갖게 됐습니다. 지난 6월 사업 양도가 마무리됐고, 현대오일뱅크의 2분기 재무제표에 리스부채 등이 반영됐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SK네트웍스의 주유소를 인수한 건 소매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오일뱅크의 상반기 기준 점유율은 20.6%로 업계 3위였습니다. 국내 정유사들은 20~30%대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시장 지배적 위치에 있는 정유사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  국내 정유사 주유소 현황./자료=사업보고서
▲ 국내 정유사 주유소 현황./자료=사업보고서

전국에 분포한 현대오일뱅크 주유소는 2237개입니다. SK주유소가 3402곳(SK네트웍스 포함)으로 가장 많고, △GS칼텍스(2361곳) △현대오일뱅크(2237곳) △에쓰오일(2154곳) 순입니다. 현대오일뱅크는 SK네트웍스 주유소를 인수하면서 전체 주유소 수는 2539곳으로 늘어났습니다. 업계 3위에서 업계 2위로 올라선거죠. 수도권의 주유소 수도 591개에서 750개로 늘었습니다. SK네트웍스의 주유소는 주로 인구 밀도가 높은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어 내수 시장의 매출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4년 중동 '아랍의 봄' 사태 이후 저유가 기조가 이어지면서 국내 경질유 수요는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를 인수해 소매시장에서 매출 확대를 노리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휘발유 제품의 매출은 8474억원으로 전체 매출에서 1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휘발유 수요가 감소하면서 관련 제품의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6393억원 감소했습니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 공간을 활용해 신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서 충전소를 주유소에 설치하고, 잔여 공간은 창고 사업과 물류업체의 배송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주유소 공간을 활용해 각종 B2C 플랫폼 사업을 추진한다는거죠. SK네트웍스 주유소 인수로 기대되는 효과입니다.

그럼에도 회계기준 변경으로 리스부채를 인식하면서 부채총액이 급증했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인수한 302곳의 주유소 중 임차 주유소는 103곳입니다. 주유소 부지와 주유 설비 등 리스 자산을 부채로 인식했고, 이는 부채총액이 7조원으로 불어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재무상태표의 부채 총액이 늘어난 것 뿐 현대오일뱅크가 상환해야 하는 부채는 아닙니다. 다만 신용평가사들은 기업의 신용등급을 평가할 때 부채비율 등을 주요 지표로 활용합니다. 부채비율이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오일뱅크는 'A1(한국기업평가 등)'의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A1 등급은 국내 신용등급 체계 및 정의에서 6개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적기상환능력이 우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정유사는 현금창출력이 우수해 신평사에서 대체로 우수한 등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대오일뱅크의 재무구조는 관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국내 정유 4사(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중 에쓰오일 다음으로 부채비율이 높습니다. 현대오일뱅크의 부채비율은 200%에 다가가고 있고, 유동비율은 84%로 100%도 안 되는 실정입니다. 통상 기업의 유동비율이 100% 미만일 경우 유동성이 풍부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차입금 의존도는 40%로 지난해 말(30%)보다 10% 포인트 증가했습니다.

현대오일뱅크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1765억원입니다. 매출채권 규모가 1조원이 넘는 만큼 유동성을 걱정해야 할 상황은 아닙니다. 현대오일뱅크는 올해 1조원이 넘는 회사채를 발행해 자본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재무구조를 안정화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해야 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회계기준 변경의 단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회계기준이 변경되기 전에는 임차 주유소의 리스비용으로 연간 220억원을 '판매비와 관리비' 계정에 반영했습니다. 회계기준이 바뀌면서 리스비용은 이자비용으로 바뀌었습니다. 리스비용이 판매비에서 제외되면서 영업이익(매출-'매출원가+판관비')이 증가하는 효과가 생겼습니다. 연간 200억원의 영업이익 증가 효과가 발생한거죠. 지난해 현대오일뱅크는 5751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큰 효과를 얻진 못했지만 요즘처럼 코로나19로 정유사의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덕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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